[금요칼럼]이찬근/국적 있는 재벌개혁을

  • 입력 2003년 4월 24일 18시 35분


코멘트
단기간의 주식매집 행위로 SK㈜ 최대주주로 등장한 소버린자산운용은 “모범적인 기업지배구조를 뿌리내리기 위해 한국에 왔노라”고 선언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권이 “이라크 민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전쟁을 택했다”고 천명한 것과 비슷한 아름다운(?) 명분이다.

이를 두고 참여연대를 비롯한 재벌개혁 진영은 “새 외국인 대주주를 맞은 참에 SK㈜는 총수의 전횡을 응징하고 기업 투명성을 높여 주주가치 경영을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의 국적성이란 의미없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말이다.

▼투기자본에 기업 무방비 노출 ▼

그러나 기업 가치를 사회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참여연대식 국적 부정의 발상은 매우 위험하다. 대기업이 국민경제에서 중요한 까닭은 새로운 사업과 기술개척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그럼으로써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정상적 주가상승 이익을 노리는 외국계 펀드엔 사회적 가치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이들은 수시 경영개입을 통해 기업의 여유현금 흐름을 장악함으로써 꼭 필요한 중장기 투자를 저지하거나, 때로는 막후에서 공갈과 협박을 불사함으로써 기업의 고유 특수자산을 갈취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게 급박해지면 경영진은 지배권 문제에 좌불안석이 되어 정상적인 경영행위에 소홀할 수밖에 없고 핵심역량을 보유한 직원들이 동요할 경우 기업경쟁력은 훼손되고 만다.

그간 재벌개혁은 경제정의 관점에서 총수의 지배권한을 축소시키는 쪽으로 맞춰져 왔다. 사외이사제 도입, 구조조정본부 해체, 출자총액 제한, 금융계열사 분리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이번 SK㈜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재벌은 국내 시장에서의 강력한 지위와 대조적으로 지배권 방어에는 취약하다. 그렇다고 지배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다른 주체가 국내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뛰어들어 국유화를 단행할 수도 없고, 은행이 소유의 중심에 나설 수도 없고, 종업원 지배가 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벌개혁에 대한 논의 지형이 바뀌어야 한다. 소유지배구조를 투명화 건전화하되 어떻게 기업의 지배권을 안정시킬 것인가라는 관점을 결합해야 한다. 초국적 투기자본을 상대로 기업의 사회적 사명을 왈가왈부할 여지조차 없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 조정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 유럽의 역사적 경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스위스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와 같은 유럽의 소국들은 예외없이 자본의 국적성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지배권 방어장치를 고안해왔다.

스위스는 등기부 주식과 비등기 주식을 법적으로 구분해 등기부 주식에 대해서는 소유권 이전을 매우 까다롭게 하는 방식을 취했고 주요 기업과 은행간의 상호 지분출자, 상호 이사파견과 같은 안정 주주공작으로 철옹성을 세움으로써 ‘알프스요새’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웨덴의 경우엔 적은 자본으로 기업의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피라미드형 출자를 허용했고, 심지어는 1주 1표란 보편적 규범에 어긋나는 차등의결권 주식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네덜란드는 한술 더 떠 발행주식의 대부분을 신탁회사에 맡기고 이를 근거로 수익증권을 발행함으로써 일반 투자자에 의한 의결권 행사를 원천 봉쇄했다. 이외에도 벨기에는 지주회사 제도를 널리 활용함으로써 호송선단식 방어망을 구축했고, 오스트리아는 주요 금융기관과 대기업에 대한 국가소유가 여전히 지배적이다.

▼유럽의 ‘지배권 방어장치’ 배워야 ▼

유럽 소국의 차별적 특성을 선구적으로 연구한 카첸스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규모가 작은 이들 나라는 일찍부터 해외진출을 시도했고, 이로 인해 대외 환경변화에 따라 국민경제가 크게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취약성이 노출됐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은 시장의 개방과 자유화를 원칙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기업의 국적성을 지키고 사회적 합의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도록 다양한 조절기제를 마련했다.” 그간 명분에 치우친 재벌개혁이 국익 차원에서 재조명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줏대있는 세계화의 길이다.

이찬근 객원 논설위원·인천대 교수 ckl1022@incheon.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