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 입력 2003년 2월 7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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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선(禪)을 배우러(?) 남방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시인이라면 가만히 앉아서 들여다보아도 알게 될 것을 굳이 거기까지 가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반 년 만에 먼 길에서 돌아온 친구를 만나보니 달라진 게 있었다. 그에게 두드러졌던 탈속의 기미가 오히려 사라지고, 일상 속에서 중도(中道)를 잃지 않는 힘과 자유로움 같은 게 느껴졌다. 선과 시(詩)가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경계도 그 어디쯤일 것이다.

손택수의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창작과비평사)에도 선적인 용어나 어조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열대야의 옥탑방에 앉아 땀에 젖어서 ‘얼음송곳처럼 따끔 침을 놓고 간 모기’(‘모기禪에 빠지다’)를 죽비이자 화두로 삼고 있는 그에게서 초월의 포즈 같은 것은 애초부터 찾기 어렵다. 시인은 탱자나무 가시 끝에 매달려 있는 빗방울을 보면서도 ‘살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둥그래진다는 것, 그건/욱신거리는 상처를 머금고 사는 일’이라고 말한다. ‘빗방울의 아픔을 궁글려 탱탱한 탱자알이 될 것’(‘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을 기다리는 이 젊은 시인의 ‘참선’이나 ‘설법’은 아리면서도 탱탱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사물의 본질을 단번에 꿰뚫는 선사적 풍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집 한편에는 고향의 속신(俗信)과 풍류를 자연스럽게 체득한 샤먼도 있고, 그 공동체적 질서에 깃들어 살았던 삶의 내력을 입담 좋게 늘어놓는 이야기꾼도 있다. 사실 시인은 선사도, 샤먼도, 이야기꾼도 아니면서 그 모든 기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예를 들어 ‘아버지와 느티나무’에서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 느티나무와 거기 기대어 선 스무살의 아버지를 보며 ‘흑백의 저 푸른 느티나무 아래서 부를 노래 하나를 장만하기 위하여 나의 남은 생은 온전히 바쳐져도 좋’겠다고 자신을 의탁하는 목소리는 샤먼의 그것이다. 또한 ‘송장뼈 이야기’에서는 어릴적 머리에 난 부스럼 딱지에 아버지가 공동묘지 터에서 주워온 송장뼈를 곱게 빻아 뿌렸더니 깨끗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몸을 ‘살아 파릇파릇한 무덤’에 비유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향의 집과 피붙이, 가축과 나무가 어우러진 그 오래된 풍경들이 기묘하게도 원시성과 현실감을 동시에 자아낸다는 점이다. 흔해빠진 컬러사진들 속에서 낡은 흑백사진이 오히려 낯선 환기력을 발휘하듯이, 그 낡고 가난한 세계는 시인의 팽팽한 말과 정신에 힘입어 풍요롭게 되살아난다. 그러한 작업은 이 문명의 한복판에 아직도 호랑이가 살아 있다고 눈 위에, 사람들의 가슴 속에 ‘호랑이 발자국 본을’(‘호랑이 발자국’) 뜨는 일과도 같다. 그러나 ‘눈과 함께 왔다/눈과 함께 사라지는’ 그 세계에서 시인은 다시 걸어내려온다. 이렇게 기억과 현실, 신화와 일상, 전근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사이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균형감각이야말로 손택수 시인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또한 시인 내면에 살고 있는 선사와 샤먼과 이야기꾼 사이의 긴장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바깥을 향해 촉을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화살나무’) 사는 화살나무처럼.

나희덕 시인·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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