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열규교수 웃음의 인생학③]한방 맞은 허세

  • 입력 2002년 9월 30일 18시 15분


경남 고성군의 ‘옥천사’는 명찰이다. 물맛이 좋아서 이름도 옥천이다. 물이 좋아서인지, 옥천사는 왕년에 질이 좋은 한지(韓紙)로 유명했다.

한데 그 한지가 말썽이었다. 이웃 고을의 향반(鄕班), 곧 시골 양반들 가운데서는 세도를 빌미 삼아서 종이를 공짜로 얻어 가는 축이 있었다.

절로서는 팔아서 불사(佛事)에 보태 쓰자고 한 건데 경제적인 손실이 우선 컸다. 뿐만이 아니다. 애써서 만든 것을 그냥 가져가니, 그것도 건방을 떨면서 가져가니, 자존심하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명문 집안에서 느닷없이 전갈이 날아들었다. 주문이 아닌 명령이었다.

승려들이 미적대고 있는데 재차 독촉 편지가 날아들었다.

“우리 XX 문중에서 금년에 또 족보를 만든다. 너희 천한 중들이 만든 종이가 우리 귀한 양반 가문 족보가 되는 영광된 기회를 주고자 하니 지체말고 헌납하도록 하라!”

한데 편지에 아니꼬운 단서가 붙어 있었다.

‘종이 값은 영원토록 외상이다. 밀린 이자는 영원히 다하는 그 때, 물기로 약조한다.’

거기에다 양반 집 족보에 쓸 거니 모름지기 목욕재계하고 지게에 실어 나르라고 했으니, 승려들이 화가 날 수 밖에.

주지가 편지를 써서 양반 집에 보냈다. 거기에는 ‘玉泉寺‘造紙’ 盡入 XX 李氏‘譜紙’ 中, 今 本寺 絶 無力’이라고 적혀 있었다.

풀이하면 ‘옥천사가 만든 종이가 모조리 XX 이씨 족보 종이 속에 다 들어갔습니다. 이제 우리 절은 힘이 다해 어쩔 수 없습니다’쯤 된다.

하지만 뜻풀이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인용부호로 묶인 한자를 소대로 읽으면 누구나 폭소를 터트릴 것이다. 귀한 족보가 순식간에 여자의 아랫것이 되었으니, 옆에 사람은 여간 통쾌한 게 아니다.

잘난 척하고 까불면 이렇게 호되게 당하는 것, 그게 천도(天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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