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 4]정도전과 한양

  • 입력 2002년 5월 12일 17시 28분


경복궁 근정문
경복궁 근정문
경기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언덕, 왕릉 부럽지 않은 장대한 묘에 들어앉아 멀리 서울을 굽어보고 있는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딛고 세워진 조선의 흥망을 600년 간 지켜봤고 지금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포은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묘를 이장하려고 장례행렬이 이곳을 지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앞서 가던 명정(銘旌)이 한참을 날아가 저 자리에 떨어졌답니다. 그래서 저곳에 묘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요.”

▼수구에 맞서다 역적몰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몰라도 정몽주의 마음을 잘 읽어 낸 이야기인 듯하다. 한양이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그는 조선이 얼마나 잘 되는지 끝까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고려 왕조의 신하로서 역모에 가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세력들이 좋은 나라를 만들어 만백성과 함께 편안히 살기를 기원해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쭉 뻗은 세종로

혁명에 반대하다 조선 건국의 희생양이 됐지만 조선 건국 후 600년 내내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돼 온 정몽주. 반대로 조선 건국의 최대 공헌자였지만 건국 후 살해되어 역적으로 비난받아 온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1342∼1398).

정몽주의 옆에 앉아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도전을 떠올린다는 것은 매우 불경스런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가 봐도 명당으로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화려하게 조성된 묘역과 그 아래의 신도비(神道碑)를 비롯해 길 건너편의 충렬서원, 경북 영천의 임고서원, 개성의 숭양서원 등 전국 곳곳에서 정몽주를 떠받들고 있지 않은가? 그에 비하면 역적으로 몰려 참수를 당한 후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이 안 된 정도전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마음을 같이한 벗이

각기 하늘 한구석에 있으니

때때로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나도 모르게 슬퍼지네

……

지란(芝蘭)은 불탈수록 향기 더하고

좋은 쇠는 담금질할수록 더욱 빛나네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서로를 잊지 말자 길이 맹세하세’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보낸 글 중에서

친원(親元) 정책을 취했던 수구 세력에 함께 맞서다 1375년 각각 경남 울산과 전남 나주 지역으로 귀양간 정몽주와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이런 글을 주고받으며 우정과 의지를 다진 둘도 없는 동지였다.

▼정몽주와 달리 추앙못받아▼

정몽주 묘역과 신도비

그러나 역사의 갈림길에서 저무는 왕조 고려를 끌어안고 죽음으로써 만고의 충신이 된 정몽주에 대해서는 이황, 기대승, 송시열, 김창협, 장현광 등 조선의 내로라 하는 선비들이 칭송의 글을 바치며 그를 통해 왕조에 충성을 다짐한 반면, 혁명을 성공시킨 정도전은 조선의 역사에서 잊혀졌다.

이방원(태종)에 의해 역적으로 참수된 정도전은 조선조 500년 내내 역사 뒤에 숨어 있다가 1860년대에 와서야 복권됐고, 그 후 그를 모시는 조그만 사당(문헌사)이 경기 평택에 세워졌을 뿐이다. 무덤조차 없던 그는 1989년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 없는 유골이 서울 서초구에서 발견돼 문헌사 부근에 가매장돼 있다.

하지만 정도전은 그런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그는 정몽주가 600년을 바라본 곳, 늘 그곳에 있었다.

북한산을 등에 지고 한강을 마주하고 앉은 그 자리에는 경복궁으로부터 뻗어 나와 관청들이 좌우에 늘어선 세종로,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종로를 중심으로 도읍이 만들어졌고, 그 설계자는 정도전이었다. 그뿐이랴. 그는 궁성과 종묘와 사직의 구도를 잡고 왕궁인 경복궁의 이름부터 주요 건물의 이름 하나하나를 직접 지었다. 새 국가에 큰 복(景福·경복)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경복궁(景福宮), 임금이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라는 근정전(勤政殿), 차분히 정사를 생각하는 사정전(思政殿), 임금이 편안히 쉬시라는 강녕전(康寧殿)…. 그는 조선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건물과 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조선의 사상적 기반을 닦아 놓았다는 것이다. 흠잡을 데 없는 가문 출신의 정몽주와 달리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고도 온갖 괄시를 받아야 했던 그는 한창 야심만만하던 30대에 약 10년 간이나 개경 밖을 떠돌며 고려의 현실을 볼 수 있었다. 유배지였던 전남 나주 회진현(현재 나주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왜구의 침입으로 피난다녔던 단양 제천 안동 원주, 그리고 고위관리들의 핍박으로 떠돌며 학문과 교육을 했던 북한산 기슭 등에서 직접 논밭을 갈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백성들의 아픔을 경험했다. 당시 고려의 체제로는 더 이상 이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것이었다.

▼군사 경제분야 저술도 남겨▼

그는 국가이데올로기였던 불교를 철저히 비판하며 고려의 사상적 기반을 갈아엎었고, 당시 가장 진보적인 사상이었던 성리학의 우수성을 주장하며 성리학이 조선의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자리잡을 기틀을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군사, 정치, 경제, 법률, 역사 등 한 사람이 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며 저술을 남겼다. 혁명을 주도하고 실제로 조선을 설계하면서 이런 학문적 업적까지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학문에 대한 이론적 관심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대 과업을 이룩하기 위한 현실적 필요 때문이었다.

정도전을 보려거든 그의 무덤을 찾을 것이 아니라 광화문 앞뒤에 펼쳐진 ‘서울’을 볼 일이다. 경복궁 경회루와 향원정 주변을 산보하는 시민들, 근정문 앞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 관광객들, 강녕전에서 사극을 촬영하는 연기자와 스탭들, 세종로와 종로를 가로지르는 자동차와 사람들, 그리고 아직도 그들의 의식과 행위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유교적 관념들. 조용히 귀 기울이면, 600년 도읍지 서울이 정도전을 이야기해 준다.

김형찬 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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