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의 이야기가 있는 요리]'김치크림소스 닭찜'

  • 입력 2002년 1월 3일 16시 43분


겨울 밤. 뭉근한 아랫목과 솜이불이 그리워진다. 요즘에야 야식집이다, 편의점이다 해서 코 앞에 심심풀이 땅콩이 흔한 세상이 되었지만 15년 전만 하더라도 일단 밤이 내리면 말똥말똥 잠은 안 오고, 궁진해진 입안을 놀려줄 먹을거리 자체가 놀이이자 재미였다.

이북이 고향인 우리집의 겨울 별미는 증조부 때부터 전해오는 ‘김치말이’. 두어달 앞서 김장철 독에 묻은 배추 김치를 큰 포기로 하나 꺼내어 석석 썰고, 김칫국물에 육수와 초로 간하여 밥을 만다. 명절을 전후해서는 남아 있는 빈대떡이나 퉁퉁한 만두를 통째 넣어 터뜨려가며 먹기도 했다.

그 뒤 근 10년간을 미국과 프랑스에서 살았는데, 겨울이면 김치말이의 평양계집 같이 차고도 감칠 맛을 그리워 했다. 1년에 세네끼 정도로 김치 먹는 일이 뜸했던 그 10년간이었지만 정작 한국에 돌아와 김치를 접할 때에 오히려 그간 담백히 정제된 입맛으로 김치를 객관적으로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요리를 공부하던 시절, 교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국의 김치는 일본의 스시 만큼이나 상품가치와 매력이 있으나 사실 친해지기는 어렵다. 강한 향(마늘, 생강, 고추, 젓갈…의 집합?)에다, 나아가 그들을 숙성까지 시켰으니….”

흠∼, 맞는 말이긴 했다. 한국인인 나도 낯설게 느껴질 만한 개성 강한 김치들이 섞여있으니. 김치의 이런 강한 요소요소들을 크림이나 버터로 얼버무린다면?

장바구니를 풀어보자. 생크림, 양파, 닭 한마리가 이미 도마 위에 꽉 찬다. 여기에 확 냄새가 풍기는 젓갈 대신, 깔끔한 배추김치를 준비한다. 너무 시지 않고 아직은 수분을 간직한 배춧대가 통통한 것으로. 숭숭 썰어서 닭의 내부에 넉넉히 채운다.

연골이 아직 녹신녹신한 영계가 다 익을 때쯤에는 발그레 배어나오는 배추의 수분으로 뻑뻑하기 쉬운 가슴살이 부드러워질 것이다. 기름이 팬에 둘러지고 닭의 등, 배, 양쪽 옆구리를 차례로 구우면 빠닥빠닥 닭껍질이 익는 소리와 함께 닭뼈의 향기가 주방에 가득찬다.

강한 불을 조절해가면서 도마위에 그득한 재료들에 칼 한자루를 들이댄다. 익어가는 닭 냄새가 한겹 배어버린 팬에 다시 양파가 볶아지며 주방의 열기가 단맛을 띠면 다시 매콤한 김치를 몽땅 털어 넣어 한데 볶는다.

모든 것은 밸런스가 관건인데, 닭을 구울 때 강하게 퍼지던 육질의 향은 양파의 단맛으로 부드러워지다가 다시 칼칼한 김치가 섞여들어 톡 쏘는가 싶다. 이때쯤 생크림이 부어지며 모두를 부드럽게 감싸 버린다.

김치크림이 자작자작 끓을 때 육수와 와인을 넣어 향미를 돋우고 겉만 익은 채 대기중인 닭에 둘러 오븐에서 마무리하면 매콤하고 고소한 핑크빛 소스의 닭찜은 완성된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 둔 와인을 오픈할 차례. 부드러운 소스에 연해진 영계 살코기를 받쳐줄 와인은 화이트 와인인 ‘에르미타주 블랑(Hermitage Blanc)’. 프랑스 론산인데 전반적으로 감도는 고소한 버터맛과 은은히 퍼져 있는 잔꽃송이 같은 향기로움이 화이트 와인 고유의 신맛과 어우러져 닭의 고소함은 부각시키되 소스맛은 느끼하지 않도록 해 준다.

밤낮없이 돌아가는 컴퓨터 세상을 잠시 잊고 주변의 전기 조명을 모두 꺼보자. 까만 겨울 저녁의 매력은 밝혀진 몇 개의 초만을 빛 삼아 흔들리고 그 잔상을 물들이는 와인 한 모금, 소스를 듬뿍 묻힌 요리 한입에 천천히, 또 천천히 빠져보자.

▼박재은 약력

미국 뉴욕대 언어학 석사.

프랑스 파리 코르동 블루에서 요리, 제과 부문 전과정 수료.

호텔 및 레스토랑의 메뉴,

스타일링 컨설팅.

현 세종대 관광대학원 강사.

파티플래너,요리사로 활동 중.

<김치크림소스를 곁들인 닭찜-2인분>

영계 1마리, 배추김치 1/3포기, 생크림 1컵, 닭육수 1/2컵, 화이트와인 2큰술, 버터 45g, 식용유 약간, 양파 1개, 당근30g, 아스파라거스(혹은 브로콜리) 30g, 소금 후추 약간

▽만드는 법

(1)영계는 내장과 겉 모두 깨끗이 손질하여 물기를 닦아둔다.

(2)김치는 여분의 속을 털어내고 우표 크기로 썬다.

(3)(1)의 속에 썰어 둔 김치의 1/3을 채우고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이쑤시개나 실로 고정한다.

(4)③의 닭 표면에 소금, 후추를 적당히 뿌려 양념한 뒤 팬에 기름을 두르고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5)④의 닭 표면이 바싹 익으면 건져내고 같은 팬에 버터를 녹여서 다진 양파와 나머지 김치를 볶는다.

(6)⑤에 생크림과 육수, 화이트 와인을 섞고 데운다.

(7)오븐용 찜기에 ⑤의 닭을 담고 ⑥의 소스를 덮어서 35분 정도 익힌다. 오븐이 없을 경우 솥에 넣고 찌거나 전자레인지를 이용한다.

(8)당근과 녹색 야채는 끓는 소금물에 살짝 데친 후 소량의 버터에 볶아서 후추로 양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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