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칼럼]대통령과 비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9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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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가 고래도 되는 첩보의 세계… 60% 맞을 것 같다고 문서화하다니
대통령들은 측근을 ‘애 취급’ 하지만 막후에서 일 저지른 건 ‘그 애들’
박 대통령 ‘변하라는 주문’ 외면하면 국정 환경 호전시키기 어려울 듯… 소수의 ‘내 사람’ 의존은 위험 자초

그 문건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원 시절 비서 정윤회 씨가 국정 막후실세로 등장한다. 세칭 ‘보좌관 3인방’은 호가호위 소(小)권력자들로 나온다.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은 내용의 신빙성에 대해 “6할 이상이라고 본다”고 언론에 말해 파장을 키웠다. 이 문건은 정부 문서, 더구나 청와대 문서, 그것도 칼끝에 피를 묻힐 수 있는 민정수석실 문서다. 공공 기록물이 되고, 역사에 남을 문건이다. 이 문건은 6할 이상 맞는 것으로 ‘본’ 일개 비서관의 감(感)에 의해 작성(작성토록 지시)되었다. 그리고 유출되고, 전파되었다. 조 전 비서관은 검사 출신인데, 검사도 6할 이상 맞아 보이면 그 내용으로 공소장을 쓰는가.

조 전 비서관은 “(정 씨 중심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으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세한 것이었다”고 문건의 신빙성에 힘을 실었다. 시정(市井)에는 날마다 이 식당 저 술집에 시사(時事)관심자들이 둘러앉아 사실과 진실, 소문과 야담을 교환한다. 뜬소문 중에도 ‘직접 보거나 들은 것처럼’ 생생한 것들이 적지 않다. 말은 한 다리 건널 때마다 멸치가 꽁치 되고, 꽁치가 참치 되고, 참치가 고래도 된다. 겨울 기러기가 봄 제비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박 대통령이 너무 급히 강하게 말하고 말았다. 문건은 찌라시 수준이고, 유출자는 국기(國紀)문란자라 하더라도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관망이 대통령의 정도(正道)다. 박 대통령은 다른 사안에서는 ‘빨리 입장을 밝히라’고 여론이 채근해도 장기간 침묵한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역대 대통령들은 측근을 ‘어린애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아들 현철 씨에 대해 세간에서는 ‘소통령’이라고 하는데도 “걔가 무슨…”이라고 일축했다. 현철 씨의 국정개입을 막으라든지, 외국으로 보내라든지 진언(進言)한 충신들이 오히려 찬밥을 먹었다. 결과는 현철 씨의 감옥행이요, 대통령의 레임덕 자초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측근 박영준 씨에 대해 경고음이 울릴 때 “그 친구가 무슨 실세야?” 했다고 전해진다. 박 씨도 그 뒤 감옥에 갔다.

박 대통령은 세 측근에 대해 그저 우직한 직원, 권력자가 아닌 비서관으로 규정했다. 동서고금 역사를 보면, 최고 권력자에게는 ‘귀여운 푸들’이 막후에서는 부나방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사나운 늑대’였던 사례가 많다. 이런 권력현상에는 예외를 발견하기 어렵다. 자식이 죄를 지어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연락을 받은 부모들도 대부분 ‘우리 애가 그럴 리 없다’는 반응부터 보이지만 ‘부모가 모르는 자식의 세계’가 따로 있다.

흔드는 바람이 많을수록 대통령은 발밑부터 단속 또 단속하고, 국정 시스템의 총체적 정상화에 매진해야 한다. 문건이 찌라시건 아니건 대통령은 국정 최종책임자로서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진 인과(因果)에 대해 자성적 성찰을 해야 한다. 청와대 기강부터 무너지는데 어떻게 국가를 혁신할 것이냐는 냉소를 뼈아프게 여겨야 한다. 비판에 화내고, 내부 논리에 위로받으며, 변화 주문을 외면한다면 국정환경을 개선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 대통령은 특히 인사 시스템이 엉망으로 깨어졌다는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한다. 현 정부 인사의 과정과 결과 상당 부분에 대해 많은 국민이 화를 내고 있다. 청와대가 과잉 인사권을 끌어안고 소화불량에 걸렸으며,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인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인사 문제 하나만 가지고 대통령이 공직에 욕심 없는 원로와 현인들을 만나 따가운 소리를 들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청와대가 더도 말고, 국민이 알고 있는 인사시스템에 따라 대통령이 강조한 대로 ‘투명하게’ 인사를 해왔다면 작금의 문서파동 같은 것도 없었으리라고 믿는다.

오직 내 사람이라야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좁은 범위의 내 사람들에게만 의존하면 견제와 균형이 깨어져 더 많은 폐해와 사고가 생기기 쉽다. 민간기업도 그러한데, 하물며 권력세계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유진룡 조응천 같은 사람이 나오는 것도 이들의 공인의식 및 인격의 측면과 별개로 정부의 시스템 고장을 의심케 한다. 견제와 균형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권부, 귀를 열고 널리 듣지 않는 대통령은 스스로 위태롭다. 청와대 회의는 대통령이 원하는 내용을 벗어나기 어렵고, 오히려 상황을 오도할 우려마저 있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


#보좌관 3인방#인사#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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