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살생부’ 부풀리는 신문… ‘대갈×-지×’ 저급한 TV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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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4>알 권리 막는 공공언어
‘언어의 표준’ 언론, 현실은…

《 ‘세상을 보는 창’으로 비유되는 언론의 언어는 공공(公共) 언어의 표준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말이 난무한다. 대부분 언론사들은 잘못된 언어 사용을 막기 위한 사전 예방 장치를 두고 있지만 독자나 시청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 부적절한 표현에 관대한 것이 현실이다. 특히 뉴스에 비해 TV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선 저급한 ‘막말’이 안방까지 그대로 전달되고 있으며 일부 인터넷 매체에선 비속어나 은어까지 여과 없이 쏟아지는 실정이다. 》

○ 폭력·차별·비하 표현 그치지 않는 신문

한 신문 사설에 “밀실공천으로 ○○○파 학살 소동이 빚어졌다”는 표현이 나온 적이 있다. 정치 기사에서도 자주 보이는 ‘학살’은 특정 계파의 후보들이 배제됐다는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하기 위한 단어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가혹하게 마구 죽임’이라는 단어의 뜻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국립국어원이 국어문화운동본부 연구진에게 맡겨 12개 종합일간지(중앙지, 지방지 각 6개)에서 신문별로 18∼37개 기사를 무작위로 선정해 총 303건을 분석한 뒤 공공 언어에 어긋난 표현으로 지목한 168건 중 하나다. 연구진은 폭력적·전투적이거나 차별·비하를 내포한 말, 선정적이고 과장된 말 등을 공공성을 해치는 표현으로 보고 조사한 뒤 보고서를 냈다. 3년 전 조사지만 지금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의미를 강조하는 수단으로 폭력적·전투적 표현을 상투적으로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일부 언론이 정치권과 인터넷 공간 등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언어폭력을 일정 정도 부추기고 있다고 판단했다. 신문 기사에 나오는 ‘살생부’ ‘등에 칼을 꽂다’ 등의 표현은 언론사 스스로가 삼가야 할 표현으로 거론됐다.

특정 기관이나 인물을 비하하는 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신문사가 피해야 하는 표현이다. 그렇지만 ‘막장’이나 ‘싸움질에 열중’ 같은 단어가 일부 신문 기사에서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미친 존재감’ ‘정치 양아치’ ‘배알 없는’ 같은 저속하고 품위가 떨어지는 표현이 서슴없이 사용될 때도 있다.

보고서에서 지적된 것은 아니지만 차별적 단어도 신문 기사에서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 ‘처녀비행’ ‘처녀작’ 등은 여성 차별적 언어로 꼽힌다. ‘처녀’는 여성의 성적, 신체적인 면을 이용한 표현으로 여성의 순결을 강조한 사고에서 비롯된 용어라고 국립국어원은 지적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처음, 첫’ 등을 써도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절름발이 성장’ 같은 표현에도 장애인 차별이 담겨 있다. ‘불균형 성장’으로 바꾸면 된다.

“슈트와는 달리 헐렁한 핏의 팬츠와 롱 재킷 스타일의 블레이저를 매치하는 식의 모던하면서….”

신문 기사의 일부다. 지나치게 외래어, 외국어를 많이 사용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다. 지나친 외래어 사용은 독자의 이해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불쾌감마저 줄 수 있다.

우리말로 표현이 가능하다면 굳이 외래어나 외국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스페셜리스트’ ‘베스트를 입다’ ‘스타일리시한’ 등의 표현이 마치 신선한 단어인 듯 나온다. ‘전문가’ ‘조끼를 입다’ ‘맵시 있는’처럼 고유어로 바꿔도 뜻이 잘 통한다. ‘인프라스트럭처’ ‘비즈니스 프렌들리’ ‘실루엣’ 등도 우리말로 바꿀 수 있다.

외래어만 알아듣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한자를 동시에 표기해야 의미가 명확해지거나 한자를 알지 못하면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표현도 많다. ‘가장납입’ ‘경도돼’ ‘미증유’는 ‘거짓 납입’ ‘치우쳐’ ‘지금까지 없었던’으로 고칠 수 있다.

○ 방송 언어, 파급력 커 더 문제

정부와 시민들은 공공언어 중 가장 정제된 말을 써야 할 대상으로 방송언어를 꼽는다. 잘못 사용한 언어의 파괴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오염된 말은 걸러 듣는 능력이 떨어지는 청소년층에 그대로 흡수될 수 있다.

그런데도 방송 언어의 오염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조사됐다. 국립국어원의 2013년 조사에 따르면 ‘공주병’ ‘된장녀’ 같은 은어, ‘싹쓸이’ ‘면피’ 같은 화투놀이 용어, ‘환치기’ ‘꺾기’ 등의 경제계 속어, ‘러브호텔’ ‘티켓다방’ 같은 화류계 속어가 그대로 방송 뉴스에서 나왔다. 또 ‘워킹’과 ‘콘셉트’ 같은 패션용어, ‘인터페이스’처럼 외래어 일색인 통신 전문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일이 아주 잦았다. 또 ‘재테크’ ‘시테크’같이 한자와 영어가 뒤섞인 조어가 전파를 타고 마구 쏟아졌다.

방송 뉴스에서 과장된 표현을 쓰거나 취재 과정에서 걸러지지 않은 언어를 노출시키는 문제도 지적된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전 국민이 경악하고 있습니다’처럼 시청자의 감정을 격앙시키는 말은 흔하게 나오는 과장된 표현이다. 최근 ‘세월호 참사’를 전하는 한 방송 뉴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한 방송사 기자는 구조된 학생에게 “친구가 사망한 걸 알고 있느냐”고 질문을 했다가 큰 비판을 받았다. 기자가 비록 막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해도 어린 학생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드라마와 예능에서 나오는 언어는 뉴스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드라마 제작자들은 막말을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주요 구성 요소로 여길 정도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인기를 끌었던 KBS ‘왕가네 식구들’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일생 동안 떨 지랄 총량이 있다” “이 대갈통에다가 짱 박아 놔야지” 등 저급한 대사가 안방에 그대로 전달됐다. 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는 비속어가 인기를 크게 끌자 주인공들이 점차 강도 높은 막말과 비속어를 쏟아내기도 했다.

예능도 마찬가지다. 올 3월 방영된 ‘맘마미아’에선 20세 남자 가수가 어머니를 ‘○○이’ ‘○○아’라고 이름으로 부르며 반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남자 출연자가 뚱뚱한 여성 진행자에게 “개 사료 드세요?”라고 묻거나(토크쇼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2월 24일), 남자 배우가 개인기를 보여준다며 성행위할 때 여성이 내는 신음소리를 비트박스(손과 입으로 리듬을 만드는 일)로 흉내 내는 모습(‘우리 동네 예체능’ 지난해 4월 23일)이 편집되지 않은 채 전파를 탔다.

○ 인터넷의 정제되지 않은 은어와 비속어

일부 인터넷 매체는 잘못된 언어를 걸러내는 장치도 없는 데다 속보 경쟁에 몰두하면서 문법적 오류는 물론이고 은어(隱語) 수준의 표현이 기사 제목으로 나오기도 한다.

‘케미 폭발’ ‘베이글녀’ ‘남심 초토화’ ‘빵 터짐’ ‘코피 퐝’ ‘올킬’ 등은 인터넷 매체 기사의 제목에 등장한 표현 중 일부다. 인터넷 공간에서 무분별하게 쓰이는 유행어나 신조어는 특정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층에게는 ‘암호’처럼 보인다.

일부 인터넷 포털사이트는 기사 내용과 관련성이 떨어지는 제목을 붙여 접속 건수 늘리기에 치중하기도 한다. 이른바 ‘낚시성 제목’이 그런 예다. 이는 인터넷 매체뿐만 아니라 신문·방송사의 인터넷용 기사도 낚시성 제목을 올리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톱스타들, 살짝만 자극해도 흥분 못 참고 그런 짓까지…’라는 선정적인 제목은 축구 선수들이 다혈질이라는 의미로 올라왔다. 일각에선 이 같은 인터넷 매체의 언론 기능을 표현의 자유의 틀 안에서 규제하거나 특단의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남영신 국어문화운동본부 대표는 “언론의 언어는 일단 진실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며 “국민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라도 언론은 바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공공언어#언론#방송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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