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물 - 말잃기증’ 쓰다 ‘복수 - 실어증’으로 돌아간 北의학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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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4>알 권리 막는 공공언어
“순우리말 어색하고 모호” 지적에 대중에게 익숙한 한자어 대거 사용

우리와 마찬가지로 서양의학 후발주자인 북한은 어떤 의학용어를 쓸까. 순우리말 의학용어만 사용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북한에서는 쉬운 한자어를 의학용어로 대거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제근 서울대 의대 병리과 명예교수가 3일 공개한 ‘남북한 의학용어의 차이 및 연구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1960년 북한 ‘의학용어 분야 학술용어 통일안(초안)’에서 순우리말 용어로 바꿀 필요성이 제기된 33개 단어 중 2000년 이후 순우리말로 완전히 변경된 단어는 콩팥 등 단 2개(6.1%)에 불과했다. 고막, 대동맥, 식도 등 한자어를 그대로 쓰기로 결정된 단어는 총 25개(75.8%),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병용하기로 한 건 6개(18.2%)였다.

당초 북한은 1945년 광복 직후 ‘외래어는 사대주의, 봉건주의의 산물’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영어 한자어 등 외래어를 주민 생활과 학계에서 몰아내는 데 집중해왔다. 1949년부터는 신문, 잡지, 단행본 등 일체의 출판물에서 한자를 삭제할 정도였다. 다만 의학 분야는 전문성 문제로 인해 예외로 인정했으나 고유어 전용을 기본으로 한 ‘문화어 운동’이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 배물(복수), 땀없기증(무한증), 말잃기증(실어증) 등 다수의 독창적인 순우리말 의학용어가 학계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북한 학계에서는 지나친 말 다듬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막, 방광, 근육 등 이미 일상화된 한자어까지 각각 귀청, 오줌통, 힘살 등 순우리말로 풀어쓰다 보니 오히려 뜻이 모호하고 어색하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 이에 가장 최근(2002년) 발간된 ‘5개국어 과학기술 용어사전’에는 쉬운 한자로 쓰인 의학용어가 대거 문화어로 다시 소개됐다.

지 교수는 “북한 의학용어의 특징은 영어 등 서구식 용어는 최대한 배제하고 대중이 가장 오래 써서 익숙한 한자어를 표준으로 삼은 것”이라며 “의사 편의가 아닌 환자 친화적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고 말했다.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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