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70년대에는 사각 학사모를 쓴 아들 사진을 집안에 걸어놓는 풍습이 있었다. 부모의 재력과 교육열 그리고 아들 농사의 성공을 과시하는 사진이었다. 지금처럼 대학생이 흔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다. 1970년 전문대 이상 취학률은 5.4%, 1975년에는 6.7%였다. 이 시절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향리로 내려와 초가삼간에서 살다가 별세했다. 지금의 충효당(忠孝堂)은 서애가 세상을 뜬 뒤 손자와 제자들이 그의 학덕을 기려 지은 집이다. 충효당 내당(內堂) 고방(광) 문에 ‘충어내(充於內) 적어외(積於外)’라는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에 진학할 무렵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박정희 대통령 외에 다른 대통령을 모르고 살았다. 어른들이 “군인들이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정권을 잡았어”라고 하는 말을 들은 것이 5·16에 관한 첫 기억이다. 5·16이 국민적 저항을 받지 않고 빠르게
백악관 관리들은 오사마 빈라덴이 총을 들고 저항했는지에 관해 결정적으로 말을 바꾸었다. 존 브레넌 백악관 대(對)테러담당 보좌관은 “빈라덴이 여성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며 특수부대원과 교전했다”고 설명했다. 다음 날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빈라덴은 무장을
모든 문명은 평등하다는 말이 있지만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세계를 주도한 것은 분명히 서구 문명이었다. 1500년에 유럽 국가들은 전 세계 영토의 10% 정도를 보유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해인 1913년 11개 유럽 제국은 전 세계 영토의 60%를
지방도시에는 특별시민과 보통시민의 구분이 있다. 서울 강남에 집을 한 채 사두고 자녀를 서울에 유학시키는 주민은 특별시민이다. 지방도시에 모든 가족이 함께 거주하는 주민은 보통시민이다. 지방의 특별시민은 금요일 저녁 서울에 올라와 처자와 함께 주말을 보내고 월
사회적 기업 수다공방을 경영하는 전순옥 대표는 신정아 씨의 자전적 에세이 ‘4001’이 나오기 전까지는 신 씨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품었던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는 “신 씨가 우리 사회의 관음증(觀淫症)과 상업주의 저널리즘에 희생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는 주요 장면마다 만월(滿月)이 떠올라 지상을 밝혀준다. 임 감독은 한지(韓紙)의 이미지를 달빛으로 형상화했다. 시청 7급 공무원 박중훈과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강수연이 교교한 달빛이 비치는 강둑을 드라이브하는 장면은
사회적 약자인 저소득층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여유 계층에서 세금을 거두어 분배 정책을 쓰는 것은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에 속한다. 복지의 이러한 기본 개념에서 어긋난 것이 최근의 전면 무상급식 논란이다. 세금으로 중산
1966년 1월 20일 제1야당 민중당의 박순천 대표최고위원은 국회본회의 정책 기조연설에서 “민중당이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며 양심적인 기업가를 보호하는 정당”이라고 선언했다.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출범시키면서
“지난 여름엔 신일 선풍기가 가고 올 겨울 혹한(酷寒)에 경동 보일러가 터졌다.” 청와대 주변에서 유행하는 정치 조크다. 6·2 지방선거 패배 후 정정길 대통령실장 체제가 해체…
김일성의 생가가 있는 평양 만경대는 산천 경개가 아름다워 조선시대 부자와 벼슬아치들이 묘를 많이 썼다. 김일성은 대대로 소작살이를 하던 묘지기의 자손이었다. 묘지기는 지주나 벼슬아치의 조상 묘를 보살펴주고 묘에 딸린 논밭을 경작해 생계를 꾸리던 하층농민이다
12월의 동티모르는 우기(雨期)로 접어든다. 싱가포르를 경유해 수도 딜리에 도착한 첫날 오후 세찬 비가 쏟아졌다. 하수시설이 없어 해변도로는 순식간에 흙탕물이 흐르는 개울로 변했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바지를 걷고 보트처럼 차를 밀고 갔다. 16세기부터 1975년까지
청와대의 7월 인사에서 이동관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 후임으로 김두우 대통령실기획관리실장이 확정 단계였다가 갑작스럽게 YTN 출신 홍상표 수석으로 바뀌었다. 종합편성채널 선정을 앞두고 일각에서 중앙일보 출신임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이동관 수석 밑의 박선규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