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잃었다”…온가족 추모행렬(feat. 굿바이 챈들러)[김현수의 뉴욕人]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1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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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 뉴욕 맨해튼 ‘프렌즈 아파트’ 앞. 팬들이 ‘프렌즈’ 스타 매튜 페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드라마 ‘프렌즈’는 캘리포니아 스튜디오에서 주로 촬영됐지만 드라마 배경이 뉴욕이라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로 외관이 자주 등장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미 뉴욕 맨해튼 웨스트빌리지에 있는 ‘프렌즈 아파트’는 관광명소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이후부터는 추모 공간이 됐다. 미드 ‘프렌즈’에서 챈들러 빙을 열연한 배우 매튜 페리가 54세에 갑작스레 영면했기 때문이다.

31일 오전 이 곳을 찾았다. 드라마는 LA 스튜디오에서 촬영했고, 배우들도 캘리포니아에 산다. 하지만 드라마 배경이 뉴욕이다보니 외관으로 등장해 유명해진 아파트다.

평일 오전인데도 팬들이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다. 전봇대 앞에는 페리의 사진과 꽃다발 더미, 그리고 팬들이 남긴 쪽지들이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가 가장 많았다.

매튜 페리의 팬이 드라마 ‘프렌즈’ 속 챈들러 빙의 뒷모습을 그려 전봇대에 붙여놨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챈들러로 있어줘서 고마워요”

“나는 불안감이 들 때마다 비디오 박스를 열고 ‘프렌즈’를 틀어놔요. 어느새 웃고 있죠.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마음에 평화와 기쁨을 줘서 고마워요, 매튜 페리.”

“페리, 당신은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relatable) 배우였어요. 당신은 챈들러가 전부인 모습으로 기억되길 싫어했지만 우리는 챈들러 덕분에 행복했어요. 하늘에서 즐거운 시간 갖기를.”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 뉴욕 ‘프렌즈 아파트’ 앞에 모인 팬들이 배우 매튜 페리를 추모하고 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팬들이 남겨 놓은 메모를 읽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는 10대들이 보였다. 이들이 태어나기 전 1994년~2004년까지 방영됐던 드라마 ‘프렌즈’. 어떻게 알까?

현장에서 만난 17살 세실리아, 14살 루나 자매는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여행 온 관광객이라고 했다.

“엄마가 원래 팬이어서 저희에게 보여줬고, 가족 모두 좋아하게 됐어요. 함께 보며 웃었던 드라마라 제 친구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어 너무 슬프네요. 저희는 ‘프렌즈’를 보며 뉴욕에 와보고 싶었고, 뉴욕에 도착한 날 페리의 사망 소식을 듣게 돼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세실리아)”

“‘프렌즈’는 특유의 바이브가 있어요. 실제 배우들도 친구처럼 잘 지냈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그들의 우정이 느껴지고 그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어요.(루나)”

자매와 함께 여행 온 엄마 셀린느 씨(42)는 “딸들과 뉴욕에 와서 ‘프렌즈’ 빌딩을 와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챈들러, 페리가 떠나 우리 마음이 모두 아팠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팬들은 ‘프렌즈’가 옛 드라마가 아닌 여전히 그들의 현재를 지키는 쇼라고 입을 모았다. 한 팬은 “대사를 외울 지경이지만 여전히 웃게 되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고 했다.

●문화의 아이콘이 된 불멸의 ‘프렌즈’

프렌즈의 주인공 6명.
프렌즈의 주인공 6명.
뉴욕에서 일과 사랑을 찾고자하는 6명의 젊은이들의 이야기 ‘프렌즈’. 마지막 에피소드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뉴욕에 ‘프렌즈 체험관’이 있을 정도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TV 황금시대에 탄생해 미국 전 국민이 함께 울고 웃으며 10년 간 정상을 지킨 행운을 누렸고, 인터넷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인해 전 세계에 새로운 팬을 계속해서 생성해 내는 레전드가 됐다.

2021년 배우들이 다시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프렌즈 리유니온’에서 제작진은 프렌즈 방영 당시 매주 평균 2500만 명이 시청, 마지막 회는 5200만 명이 봤으며 지금까지 OTT 등을 통해 1000억 회 이상 재시청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리유니온에는 BTS도 영상으로 출연해 “프렌즈를 보며 영어를 배웠다”고 언급했다.

현대인의 판타지랄까. 완벽한 타인으로 만난 사람들이 가족보다 더 따뜻한 친구가 되며 생기는 이야기, 사회에 첫발을 내딘 불안정한 20대가 일과 사랑을 찾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고 있어 시대를 초월하는 무언가 있다. 20대 초반 의사 남편과 결혼해 ‘취집’하려던 레이철은 결혼식날 도망쳐 주인공들과 만난다. ‘아빠카드’를 자르고 독립을 향해 나아갈 때 모니카가 이렇게 말한다.

“진짜 세상에 온 걸 환영해. 끔찍하지. 사랑하게 될거야.(Welcome to the real world. It sucks. You‘re gonna love it)

‘프렌즈’ 팬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대사,  ‘우리는 잠깐 헤어졌던 거잖아(We are on a break)’는 여전히 미국에서 농담 같은 논쟁거리다. 심지어 이 문구를 적은 현관문 앞 매트도 아마존에서 팔고 있다. ‘로스와 레이첼은 헤어진 상태였나요? 예스(yes) 혹은 노(no)에 배달 물건을 놓아 주세요.’
‘프렌즈’ 팬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대사, ‘우리는 잠깐 헤어졌던 거잖아(We are on a break)’는 여전히 미국에서 농담 같은 논쟁거리다. 심지어 이 문구를 적은 현관문 앞 매트도 아마존에서 팔고 있다. ‘로스와 레이첼은 헤어진 상태였나요? 예스(yes) 혹은 노(no)에 배달 물건을 놓아 주세요.’

6명의 친구들 중 매튜 페리가 연기한 챈들러는 안정적인 전문직에 돈 잘 버는 직장인이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인들에게 ‘친구를 놀리는 게 사랑의 표현’이라는 롤 모델을 만들어 줬다고 한다. 부모님의 이혼, 외아들로 자라 외로운 챈들러는 냉소적 농담으로 자신을 방어하지만 친구들은 그 안의 따뜻한 마음을 알아본다. 시즌 5 에피소드 11에서 챈들러는 새해 결심으로 “친구들을 더 이상 놀리는 농담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로스의 가죽 바지 앞에 코믹한 고통을 받는다.

드라마 ‘프렌즈’의 한 장면.

90년대 젊은 여피족의 상징인 챈들러는 자기 직업이 늘 불만이었다. 너무 지루하고 뻔한 대기업 직장인. 문제는 친구들도 챈들러가 뭘 하는지 몰랐다. 시즌4 에피소드 12의 한 장면.

“챈들러의 직업은?”

답을 모르면 아파트를 빼앗길 수 있는 ‘상대방에 대해 맞추기’ 퀴즈. 모니카와 레이철은 챈들러 아버지 라스베이거스 쇼 이름까지 속속들이 알면서 챈들러 직업을 몰라 아파트를 뺏긴다. 정확한 답은 ‘통계 분석 및 데이터 재구성(statistical analysis and data reconfiguration)’.

100달러 내기로 시작해 결국 아파트까지 판돈을 키운 모니카의 경쟁적인 성격, 6명 친구들 중 본인도 싫어하는 지루한 직업을 가졌지만 어쩔수 없이 회사에 가는 챈들러 캐릭터가 잘 드러난 장면이다.

페리는 처음 ‘프렌즈’ 대본을 읽었을 때 “누군가가 나를 1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내가 한 농담을 훔치고, 내 매너리즘을 따라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제작자도 페리를 보자마자 챈들러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제작자 데이비드 크레인, 마타 코프만은 “‘프렌즈’는 우리가 보낸 뉴욕에서의 20대를 배경으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챈들러도 제작자들의 친구 이름이었다. 이들은 ‘프렌즈 리유니언’에서 “챈들러 역할은 그저 재밌는 농담을 하는 캐릭터라 배우 캐스팅이 쉬울 줄 알았다. 하지만 수많은 배우에게 대사를 읽게 해도 도통 재미가 없었다”며 “매튜 페리는 달랐다. 그가 대사를 읽으면 농담이 살아났다. 페리 말고는 챈들러 역할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프렌즈’는 챈들러와 모니카가 결혼해 아이들과 함게 뉴욕 맨해튼 아파트가 아닌 교외 주택으로 이사를 가며 막을 내린다. 제작자 코프만은 “‘프렌즈’는 인생에서 친구가 가족인 시기의 이야기다. 자기 가정을 가지면 친구들과 멀어지게 된다. 주인공이 가정을 꾸리며 극을 끝내는 것이 자연스런 엔딩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챈들러와 모니카의 새 교외 단독 주택에는 ‘조이의 방’ 있어 이들의 우정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해 시청자가 바라던 결말을 보여준다.

●평생 외로움 불안감과 싸웠던 배우

‘프렌즈’에서 챈들러는 성장하는 인물이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추수감사절을 싫어하고, 냉소적이며 한 여자에게 헌신하지 못하는 이슈가 있었다. 하지만 모니카를 만나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이 된다. 지루한 직장인에서 적성에 맞는 광고 카피라이터로도 변신 한다.

현실에서 그의 삶은 어땠을까. NYT 표현에 따르면 그는 회당 100만 달러(13억5000만 원) 수익을 올리는 부자였고, 유명했고, 잘생긴 인물이었다. 하지만 평생 불안감 속에 약물과 술 중독에 시달렸다. 챈들러처럼 부모의 이혼, 냉소, 외로움, 자기 의심에 시달렸지만 챈들러처럼 이를 극복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2015년 매튜 페리 모습. AP뉴시스
매튜 페리는 지난해 이맘때쯤 책을 냈다. ‘프렌즈, 연인들, 큰 끔찍한 것들(Friedns, Lovers, the Big terrible things)’. 그의 약물 중독 여정과 극복에 대한 생생한 내용이 담긴 책으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화제를 모아왔다.

그는 어린시절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에게 버림받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아버지 존 베넷 페리는 배우였고, 어머니 수잔 랭포드는 피에르 트뤼도 전 캐나다 총리(현 쥐스탱 트뤼도 총리의 아버지)의 대변인으로 일했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어렸을 때 이혼했고 둘 다 재혼 가정을 꾸렸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페리는 14살 때 술에 입을 댄 뒤 18살에 매일 술을 마셨다. 24살에 프렌즈 스타가 돼 꿈을 이뤘다. 그는 회고록에서 “명성이 모든 것을 바꿀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나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고 썼다.

하지만 중독은 심해져갔다. 28세이던 1997년, 제트스키 사고로 접한 진통제의 힘을 느낀 뒤 점점 용량을 늘려 하루 55알까지 삼킬 정도에 이르렀다. 점점 중독 약물 종류도 다양해졌다. 중독의 대가는 처참했다. 그는 중독 치료에 900만 달러(121억 원)를 썼다고 했다. 2018년에는 위장관 천공으로 2주 간 혼수상태, 10차례 수술, 10개월 배변 봉투를 달아야 했다. 당시 그가 살아남을 확률은 2%였다고 한다.

페리는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을 때,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생생하고 어두운 이야기,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 숨겼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자서전을 통해 밝혔던 이유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약물중독을 막거나 재활을 돕고 싶다고 했다.

‘프렌즈’에 대해 언급하길 꺼려했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치유되는 느낌도 들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삶의 의지를 바로잡던 그였지만 안타깝게도 29일 자택 자쿠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됐다.

제니퍼 애니스톤을 비롯해 ‘프렌즈’ 나머지 출연진은 “우리는 매튜를 잃어 큰 충격에 빠졌다.우리는 가족이었다”며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지만 지금은 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실을 두고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가지겠다”고 밝혔다. 페리는 ‘프렌즈’를 처음 촬영할 당시 “우리가 진짜 친구가 돼야 한다”며 6명이 한동안 매일 식사를 같이했다고 회고했었다.

웨스트빌리지 ‘프렌즈 아파트’를 찾은 팬들은 ‘프렌즈’도, 매튜 페리도 계속해서 그들 삶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웃음과 마음의 평화가 필요할 때 우리 팬들은 뭘 해야 할 지 알고 있습니다.”

프렌즈 아파트와 같은 스트리트에 위치한 웨스트빌리지 전경. 이 곳에서 걸어서 5~7분 거리에 드라마 ‘섹스앤더시티’ 속 캐리 아파트 촬영지가 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P.S. 프렌즈 아파트에는 뭐가 있을까? 실제 아파트다. 1900년 지어진 이 아파트는 22세대 방 하나짜리 아파트라 싱글 혹은 커플이 살기 적당한 곳이다. 뉴욕의 여느 오래된 아파트처럼 엘리베이터나 유닛 내 세탁기가 없지만 타운하우스가 즐비한 웨스트빌리지 금싸라기 위치에 있어 월세가 비싸다. 부동산 사이트 ‘스트릿이지’에 따르면 월세는 3500~5000달러 선. 최근 유닛을 몇 개 합쳤는지 방 4개짜리 아파트가 월 1만1000달러에 임대됐다는 기록이 있다. 드라마 설정처럼 방 2개짜리라면 현재 기준 7000~8000달러 선이란 얘기다.

‘고군분투하는 20대가 저런 (뉴욕치고) 초호화 아파트에 사느냐’는 비난에 제작진은 모니카의 대사를 통해 할머니가 남긴 ‘렌트 컨트롤드(고정 월세제도)’ 아파트로 월세 200달러라고 밝힌 바 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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