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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국제

아프간 美 대사관 성조기 내려져… 시험대 오르는 외교 리더십

입력 2021-08-16 10:39업데이트 2021-08-16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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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대통령궁에 입성한 탈레반 부대
이슬람 무장반군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까지 완전히 점령하면서 아프간 현지는 물론 워싱턴까지 급속한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이 부랴부랴 현지 대사관 인력을 전원 철수시키고 있지만 미국인을 향한 테러 가능성 등이 제기되면서 불안이 증폭되는 상황이다. 공화당을 중심으로 정가의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미국의 외교력이 또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15일(현지 시간) CNN방송과 AP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은 아프간 수도 카불에 위치한 대사관 인력을 이르면 16일 오전까지 전원 대피시킬 계획이다. 최소한의 인력은 남기겠다는 당초 계획을 카불 함락 하루 만에 뒤집은 것. 대사관에는 미국 외교관과 아프간 현지 지원인력을 합쳐 4200명이 근무해왔다. 이들이 패닉 상태 속에 황급히 아프간을 빠져나가면서 대사관에 걸려있던 성조기가 내려졌다.

미 국방부는 이날 자국민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카불 공항으로 병력 1000명의 추가 투입을 승인했다. 당초 3000명이었던 병력은 탈레반이 순식간에 아프간 전역을 점령해버리면서 계속 추가돼 총 6000명까지 늘어났다. 미국대사관은 이날 경계경보를 통해 카불 공항에 총격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알리며 대피를 지시했다.

●안일한 상황 오판과 부실한 대응책
美, 헬기 동원 자국민 대피 15일 미군 수송헬기 ‘CH-47’ 치누크 헬리콥터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주재 미국대사관 위를 날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주요 도시를 모두 장악한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이 카불까지 장악하는 것이 가시화되자 대사관 직원과 미 외교관 등을 대피시키기 위한 헬기가 마련됐다. 카불=AP 뉴시스
속전속결로 이뤄진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과 이에 혼비백산한 미국 대사관 인력의 탈출은 9.11 테러 20주년을 코앞에 두고 벌어졌다. 20년을 끌어온 미국의 아프간 전쟁이 끝내 실패한 전쟁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들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 것이다.

이로 인해 조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이 돌아왔다”고 호언했던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까지 흔들릴 판이다. USA투데이는 “탈레반의 아프간 점령은 ‘미국이 돌아왔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외교정책 약속을 호되게 타격하는 결과”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동맹국들이 자신들의 국가 안보 이익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중대한 정책 결정을 놓고 미국이 충분한 협의를 진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며 “앞으로 안보 문제에서 미국에 의존할 수 있을지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외신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철군 결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도와 방식이 문제라는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철군 이후 상황에 대해 오판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비책도 충분히 세워놓지 않은 채 서둘러 이를 강행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철군 전이던 6월에는 탈레반의 아프간 재장악 및 아프간 정부의 붕괴 시점을 향후 6~12개월, 철군이 완료된 지난주에도 ‘향후 90일’ 정도로 잡고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불과 5주 전 백악관에서 철군과 관련해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면서 “탈레반이 나라 전체를 장악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말했다. 아프간 병력이 잘 훈련돼 있으며 탈레반의 역량은 따라가지 못한다고 호언했고 “사람들이 미국대사관 지붕에서 (헬기로) 들려 올려지는 상황은 없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미군은 철수 방침이 확정된 이후인 7월 초 아프간 정부에 제대로 알리지도 않은 채 한밤중에 야반도주하듯 현지 기지에서 철수했다. 이런 식의 철수가 아프간 정부와 국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것은 물론 탈레반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바이든 행정부가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당국자들은 뒤늦게야 이런 백악관의 오판을 인정했다.

●제2의 9.11테러? 우려 속 쏟아지는 비판
아프간 가즈니에 걸려 있는 탈레반 깃발
탈레반이 미국에 보복성 테러를 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이날 상원의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화 브리핑에서 “아프간 내 테러리스트 그룹의 집결과 재건 속도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수정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펜타곤의 고위당국자들은 앞서 6월 “미군의 철수 이후 2년 안에 알카에다 같은 극단주의 테러그룹들이 다시 힘을 얻어 미국 본토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이 속도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빨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인터넷 전문매체 악시오스는 ‘바이든의 오점’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 대통령의 예측이 이렇게 빠르게 틀린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지적했다. CNN방송도 “역사는 아마도 이날을 불명예로 기록할 것”이라고 했다.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 전 중부사령관은 BBC방송에 “현재 상황은 명백하게 재앙적”이라고 우려했다.

●거센 역풍에 고심하는 바이든
주말을 캠프 데이비드에서 보내고 있던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화상으로 아프간 상황을 보고받았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마크 밀리 합참의장,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애브릴 헤인스 국가정보국(DNI) 국장,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 및 로스 윌슨 아프간주재 대사 등이 참석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반응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철군 계획을 번복할 가능성은 낮다. 그는 철군 외에 다른 대안은 미국에 더 나쁜 선택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미군이 남아있더라도 결국 탈레반의 재집권 및 이들과의 유혈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는 리처드 홀브룩 전 아프간·파키스탄 특사에게 “아프간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려고 우리의 자식들이 피를 흘려야 하느냐”고 물으며 전쟁 종식의 필요성을 역설한 적도 있다. 그는 조만간 대국민연설을 통해 아프간 상황 및 관련 정책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다.

워싱턴=이정은 특파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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