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승헌]주례 담화라도 시작하면 어떨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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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미국 등 서방과 이란의 역사적인 핵협상이 타결된 지 2시간여 뒤인 14일(현지 시간) 오전 5시경 기자의 휴대전화에 e메일이 왔다는 표시가 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전 7시 핵협상 타결과 관련해 생방송으로 긴급 성명을 발표한다는 백악관 대변인실의 e메일이었다.

‘백악관 사람들은 잠도 없나…’라는 생각도 잠시, 오바마 대통령은 조 바이든 부통령과 CNN 등으로 생중계되는 성명 발표를 위해 백악관 내 회견장에 섰다. 오바마 대통령의 얼굴은 푸석했고, 바이든 부통령의 눈은 충혈돼 있었다. 협상 내용을 보고받느라 거의 잠을 못 잔 듯했다. 그런데도 오바마 대통령은 “핵협상 타결로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사실상 못하게 됐다”며 미 국민들에게 협상 내용과 의미를 설명했다. 중동 정책에 일대 변화를 불러올 외교 이슈에 대해 대통령이 지체 없이 ‘대국민 보고’를 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 발표 직후 뉴욕타임스 간판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과 인터뷰를 하더니 15일에도 기자회견을 자청해 협상 타결에 대해 백악관 출입기자들과 난상 토론에 가까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역시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선 일부 기자들이 공세적 질문을 퍼부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핵협상으로 이란이 핵무기를 갖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당신들도 그 정도는 알지 않느냐”며 물러서지 않았다.

이란 핵협상 타결 후 오바마 대통령이 이틀 사이 보여준 새벽 성명 발표, 프리드먼 인터뷰, 기자회견을 보면서 국민들이 주요 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투명하게 접하는 게 그렇지 않은 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새삼 절감했다. 대통령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의 언어로 가급적 빨리,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적어도 ‘대통령 의중이 뭘까’를 놓고 소모적인 추측은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라는 국가적 이슈가 터진 후 뚜렷한 메시지를 일찍 내놓지 않아 사회적 혼란이 가중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미 정치 문화를 수평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 기자회견 등을 통한 박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 전달 횟수는 턱없이 적은 편이다. 올해 들어 제대로 된 회견은 1월 신년 기자회견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국민들은 ‘요즘 박 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하는 궁금증과 갈증을 지우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회견식의 대국민 메시지 전달이 불편하다면 다른 형식을 찾아보면 어떨까. 오바마 대통령이 지금도 하고 있고 이명박 전 대통령 등이 애용했던 주례 담화가 참고할 만하다. 양방향 소통이 아니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미리 정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주례 담화라고 꼭 거창한 국정 이슈를 담을 필요는 없다. 오바마 대통령은 인터넷과 라디오로 전달하는 주례 담화에서 독립기념일(7월 4일)을 맞아 미국의 건국 정신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지난해 추수감사절엔 가족의 가치를 나누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요즘 매진하는 창조경제혁신센터에 대한 의지를 전할 수도 있고, 필요하면 ‘배신의 정치’와 정치권 개혁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정리해 더 공론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입성 전부터 메시지의 양과 빈도를 아꼈고, 희소성 있는 메시지의 폭발력을 잘 활용해 왔다. 하지만 이런 신비주의형 메시지 관리를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계속 이어가는 것은 효율적인 국정 운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임기 후반기를 맞는 박 대통령이 더 늦기 전에 나름의 대국민 소통 방식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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