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배극인]한 그릇에만 담을 수 없는 한일관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배극인 도쿄 특파원
배극인 도쿄 특파원
‘힘들고 아픈 날도 많지만 산다는 건 참 좋은 거래요∼.’ 무대에 오른 69세 일본인 여성은 눈을 꼭 감고 가수 홍진영의 트로트 곡을 불렀다. 가사를 음미하는 듯한 그의 눈에는 살짝 이슬이 맺혔다. 노래가 끝난 뒤 그는 “이 노래를 부르면 힘이 생긴다”고 소감을 말했다.

10대나 20대만 케이팝에 빠졌을 거란 생각은 선입견이었다. 토요일이던 지난달 16일 오후 일본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케이팝 콘테스트에는 초등학생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참가해 열기를 뿜어냈다. 사전 심사를 통과한 25팀 48명은 가족 단위부터 대학 동아리 OB까지 사연도 가지가지였고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같은 날 저녁 도쿄 세타가야 구의 한 마을 문화홀에서는 일본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학예회처럼 펼치는 공연이 있었다. 약간 늦게 행사장에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무대에서는 40, 50대 엄마들이 소녀시대 노래에 맞춰 그룹 댄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카라, 크레용팝 등 인기 걸그룹의 최신곡이 이어지면서 열기는 더해졌다. 아빠들의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얼마 전 지방으로 발령 난 50대 일본인 지인의 환송회에는 초면이 많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최근 방영 중인 일본 드라마 얘기를 꺼내자 화제는 금방 한류 드라마로 옮겨 붙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한다는 40대 여성은 “혐한 분위기 때문에 티를 안 낼 뿐이지 새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친구들 사이에 ‘봤어? 봤어?’ 하는 문자가 오고 간다”며 웃었다.

22일로 다가온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앞두고 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치, 외교라는 그릇에만 담을 수 없는 게 생활 속에서 느끼는 한일 교류 50년의 성과다. 혐한 바람이 거세다지만 한류 사랑은 여전히 얼음 밑을 세차게 흐르고 있고 지난 한 해 503만 명이 한국과 일본을 오갔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주춤하지만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도 다시 회복되는 추세로 최근 3년간 매달 전년 대비 20%씩 줄던 한국 방문객이 5월에는 4.7% 감소에 그쳤다. 한국관광공사는 가을 도쿄에서 열리는 관광엑스포에 역대 최다인 50개 부스를 설치해 대대적인 분위기 반전에 나설 예정이다. 경제적으로도 해외시장에서 한일 공조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일관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일관계 악화로 인한 외부불경제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크다. 한일 모두 미국과의 동맹 강화에 경쟁적으로 매달리면서 필요 이상의 국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안보 불안이 겹친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해 대대적인 국방비 증액이 불가피하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장기적으로는 한일 모두 입지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사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슈를 여러 그릇에 나눠 담고 시간 축을 달리해 대응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직구가 통하지 않으면 변화구도 던지자는 얘기다. 어쨌거나 한일협정 체결 당시 반성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일본의 역사인식도 고노 담화(1993년)와 무라야마 담화(1995년),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1998년), 간 담화(2010년) 등을 통해 조금씩 개선돼 왔다. 지금 반동이 크다지만 시대정신을 거스르기는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가능성 발언에 일본은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양국은 손잡고 갈 수 있는 길이 많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전체 역사로 보면 2500여 년에 걸쳐 교류하고 영향을 주고받은 이웃이기도 하다. 양국 정상이 22일 각각 열리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행사에 모두 참석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길 기대해 본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
#한일관계#한류#관광엑스포#과거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