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48년 우정, 내 인생 가장 큰 축복… 잘 가시오 친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5일 03시 00분


코멘트

[‘싱가포르 國父’ 리콴유 타계]‘동갑내기 친구’ 추도문 WP에 기고
리 1967년 하버드大 방문때 첫 만남… 베트남전 토론 보고 “역겹다” 직격탄
美대통령들 그를 초대해 한수 배워… 오바마 ‘亞회귀 정책’도 영향받아
글로벌 질서 꿰뚫은 국제정치 멘토… 전세계가 그를 그리워할 것

“그는 위대한 글로벌 전략가이자 정치 사상가였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친구였다. 그와 오랜 우정을 나눴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였다.”

‘서방의 거목’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92)은 동갑내기 친구였던 ‘동방의 거목’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타계 소식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24일(현지 시간)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장문의 추도사 ‘세계는 리콴유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The world will miss Lee Kuan Yew)’에서는 50년 가까이 쌓은 두 사람의 우정이 묻어난다.

1970년대 중국을 상대로 ‘핑퐁외교’를 펼쳐 ‘죽의 장막’을 걷어낸 키신저 전 장관은 리 전 총리를 싱가포르의 국부로뿐만 아니라 미중 간 역학 관계와 글로벌 질서의 핵심을 꿰뚫은 국제 정치의 멘토로 기억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1965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분리 독립한 뒤 초대 총리에 취임한 리 전 총리는 키신저 전 장관이 교수로 재임하던 미 하버드대를 찾아갔다. 미국 주도의 베트남전을 비판하던 교수들은 린든 존슨 당시 미 대통령이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인지, 아니면 정신병자인지를 놓고 토론했다. 이 장면을 지켜본 리 전 총리는 키신저 전 장관 등 교수들에게 “당신들 말을 듣자니 역겹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미국이 하나로 강하게 뭉쳐야 싱가포르의 독립과 번영이 가능한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고 쏘아붙였다. 키신저 전 장관은 “(나와 비슷하게) 리 전 총리는 그때부터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해 미국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고 있었다”며 인상적인 첫 만남을 회고했다.

두 사람은 그 후 최근까지 각종 국제회의 등에서 수백 차례 만나 각종 현안을 논의했다. 특히 중국의 부상과 아시아 안정을 위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오래전부터 교감했다고 키신저 전 장관은 밝혔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국제자문단 창립 회의에선 동료 자문위원으로 만나기도 했다. 리 전 총리는 당시 회의에서 “한국이 기로에 서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 안에서 자기 나름의 아시아적 가치에 따라 기업 구조조정 등 개혁을 실시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2009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상공회의소에서 공로상을 받은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왼쪽)가 수상 소감을 밝힌 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을 포옹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2009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상공회의소에서 공로상을 받은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왼쪽)가 수상 소감을 밝힌 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을 포옹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리 전 총리의 이 같은 혜안 때문에 역대 미 대통령들은 앞다퉈 그를 워싱턴에 모셔 ‘한 수’ 배우려 했다. 실제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2009년 10월 그를 백악관에 초대해 아시아 정책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를 바탕으로 2010년 ‘아시아 회귀 정책’을 발표했다.

일각에서 리 전 총리의 리더십을 권위주의라고 비판하는 데 대해 키신저 전 장관은 “그는 오로지 책임 있는 리더십을 갈망한 ‘청교도’적인 사람이었다”며 일축했다.

“위대한 지도자는 종종 한번도 가 보지 않은, 심지어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곳으로 사회와 국가를 이끌기도 한다. 때때로 기존의 지혜를 거부하기도 한다. 리콴유는 좋은 교육, 부패 척결, 성과주의라는 수단으로 오늘의 싱가포르를 만들어 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타계한 리 전 총리를 향해 “내가 아는 그는 감성적인 표현에는 서툴렀지만 싱가포르의 번영이라는 믿음을 갖고 항상 문제의 본질을 이야기했다”며 “우리는 리콴유에게서 많이 듣고 배웠으며 앞으로도 그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추도사를 마무리했다.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