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불가사의’ 이스터섬의 조용한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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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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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령 복속 124년 만에 원주민들 주권 회복 움직임칠레 “독립 대신 자치 확대”

“이스터 섬이 아닙니다. 라파누이 섬입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1888년 칠레령으로 복속된 뒤 124년이 지났지만 뿌리를 찾고 주권을 회복하려는 원주민들의 움직임이 최근 활발하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6일 “조만간 이 조그만 섬에서 사라졌던 왕조가 다시 탄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섬 인구(5806명)의 60%를 차지하는 폴리네시안 계열 라파누이 원주민들의 요구는 명확하다. ‘우리 땅이니 스스로 통치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 칠레의 통치 이후 섬이 발전했지만 과실은 대부분 칠레 몫으로 돌아갔고 고유문화는 잠식당했다. 관광사업이 번창해 하룻밤 1100달러(약 120만 원)짜리 특급호텔 등 다양한 부대시설이 들어섰지만 원주민 대부분은 입에 풀칠하기도 벅차다.

라파누이는 무엇보다도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섬의 자연과 문화가 훼손되는 게 마음 아프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지만 수많은 관광객이 몰리다 보니 모아이 석상에 미치는 피해도 적지 않다. 칠레계 주민 비율도 급격히 늘고 있다. 칠레계는 지난 10년간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현재 섬 인구의 약 39%에 이르렀다. 이대로 가면 비원주민의 반대로 독립을 거론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라파누이가 최근 섬 공항 활주로를 점거하는 시위를 벌인 데는 ‘더 미뤘다간 이런 상황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크게 작용했다.

원주민들은 일단 ‘왕정 복원’을 독립의 1차 단계로 보고 있다. 지난해 말 섬 의회는 마지막 왕의 손자인 발렌티노 투키 씨(81)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입헌군주제 형식으로 주권을 되찾겠다는 의지다. 투키 씨는 1950년대 칠레 정부가 원주민들의 여행권을 제한할 때 투쟁한 경력이 있어 상징성도 크다. 그는 “뉴질랜드와 자유연합협정을 맺어 외교권은 뉴질랜드에 주고 입법권과 행정권을 획득한 쿡 제도가 우리의 모범 사례”라고 설명했다.

칠레 정부 측은 독립은 인정할 수 없지만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카를로스 리앙카케오 이스터 섬 통치 장관은 “어려움에 시달리는 원주민의 불만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섬 의회 권한을 확대하고 일자리와 교육을 보장하도록 애쓰겠다”고 약속했다. 라파누이 내부에서도 독립은 시기상조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알베르토 오투스 의회 원로회장은 “당장 칠레와 관계가 끊기면 섬이 원시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스터섬#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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