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지구촌 새권력/러시아]<下> 불씨 지핀 ‘모스크바의 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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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푸틴 2만여명 “우리가 권력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3선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날인 5일 밤 모스크바의 최고 권부인 크렘린궁 주변에서는 친(親)푸틴 시위대와 반(反)푸틴 시위대가 ‘맞대응 야간시위’를 벌였다. 반푸틴 세력은 시내 중심에 텐트를 치고 ‘농성시위’를 벌이려고 했으나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무산됐다.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판 ‘모스크바 점령시위’는 불발에 그쳤으나 불씨는 지폈다고 분석했다.

5일 오후 6시 반경 크렘린궁 외곽에서 700m가량 떨어져 있는 푸시킨 광장에 ‘반푸틴 시위대’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슴에는 ‘하얀 리본’을 달았다. 하얀 리본은 지난해 12월 총선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진 이후 등장한 ‘공정선거’를 촉구하는 야권의 상징물이다. 집회장으로 가는 길 양쪽에는 장갑차처럼 보이는 시위진압 차량과 트럭이 조명 아래 대기하고 있었으나 시위 참가를 막지는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선거 다음 날인 5일에 모이자’는 내용이 널리 알려져 불과 몇 분 만에 광장은 진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야권 지지자로 가득 찼다. 야권 지도자들은 군중을 뚫고 연단으로 향했다. 주최 측은 참가자를 2만 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광장 옆 푸시킨 영화관 건물에는 ‘공정한 선거를 위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렸다.

공식 집회는 오후 7시 20분 시작됐다. 야권 지도자 블라디미르 리시코프 씨는 “우리는 총선과 대선을 다시 실시할 것을 요구한다”고 외쳤다. 자유주의 성향의 야권 지도자 가리 카스파로프 씨는 “푸틴이 어제 흘린 것은 눈물이 아니라 보톡스였다”며 “러시아의 지도에서 보톡스의 웅덩이를 지워버리자”고 호소했다.

집회는 민족주의 성향의 유명 블로거 알렉세이 나발니 씨의 연설로 절정을 이뤘다. 그가 “우리도 한 표가 있다, 여기 우리가 권력이다”라고 연설하자 군중도 “우리가 권력이다”라며 호응했다. 그는 “우리는 계속 거리로 나올 것이고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간간이 ‘푸틴 없는 러시아를 원한다’는 구호도 터져 나왔다.

오후 8시 반경 공식 집회가 끝났다는 안내방송이 나온 뒤 광장 곳곳에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수천 명이 “우리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때 경찰과 대테러부대 ‘오몬’ 요원들이 집회장에 투입됐다. ‘좌익전선’ 지도자 세르게이 우달초프 씨와 나발니 씨 등 지도자 10여 명이 체포되고 수백 명이 연행됐다. 일부 시위대가 “폭력을 중단하라”고 외치며 저항했으나 큰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일부 시위대는 푸시킨 광장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트베르스카야 거리로 이동해 가두행진을 벌였고 일부는 크렘린궁 주변을 에워싸고 인간 띠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현장에서 250명을 연행했지만 몇몇 주모자를 제외한 대부분을 이날 밤 석방했다. 야권은 10일에도 모스크바 시내 곳곳에서 집회를 다시 열겠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이날 오후 6시경 크렘린궁에 인접한 마네슈 광장에서는 친푸틴 청년조직 ‘나시’의 지지시위가 열렸다.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푸틴의 승리를 지켜내자’는 구호와 큰 음악소리 때문에 주변 차량의 소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주최 측이 약 4만 명이라고 밝힌 친푸틴 시위대는 8시경 조용히 해산했다.
▼ “푸틴, 개혁요구 수용… 동북아 조정역 강화할 것” ▼
러 세계경제연구소 페도롭스키 센터장

“5월에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중산층의 요구와 이해를 반영하는 정치개혁에 나서고 동북아지역에서는 조정자 역할을 강화할 것이다.”

5일 모스크바에서 만난 알렉산드르 페도롭스키 러시아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 태평양센터 소장(사진)은 “푸틴 체제가 정치개혁을 서두르지 않으면 거리시위를 잠재우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렇게 내다봤다. 페도롭스키 소장은 1977년 모스크바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지냈다.

―푸틴 지지율이 64%에 이르는데 야권이 반대하는 이유는….

“옛 소련 붕괴 이후 20년 동안 러시아에서는 시장경제가 발전해 왔는데 정치구조는 이런 현실을 반영하지 못했다. 2000년부터 정부가 통제 일변도로 나가면서 야권의 불만을 키웠다. 푸틴은 야권의 요구를 수용하기는커녕 더 통제하고, 관료주의와 부패가 만연하다 보니 사회적 불만이 폭발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어느 계층이 시위를 주도하는가.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돈을 벌고 있는 신흥 중산층이다. 이들은 정치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길 원하지만 구시대 정치체제는 이를 흡수할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 지난해 푸틴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장기판에서처럼 자리를 바꾸겠다고 선언할 당시 신흥 중산층은 ‘우리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고 선거 과정에서 우리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사인을 보냈으나 집권층이 이를 무시했다.”

―푸틴 총리는 대선 이후 야권과 대화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는데….

“야권은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시작할 때 만나겠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길거리 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신세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소통하며 서유럽식 자유를 누리려 한다. 대화가 쉽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3선에 성공한 푸틴이 종전처럼 시위를 강경 진압한다면….

“푸틴이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고 본다. 의회로 진출하지 못한 정당을 합법화하는 법안, 주지사 임명제를 직접 선거제로 돌려놓는 법안 등이 통과되리라 예상한다.”

―푸틴 총리가 국내의 불만을 해외로 돌리려는 전략을 선택하겠는가.

“서방 국가와의 대립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은 이제 통하기 어려울 것이다. 2007년 신(新)냉전을 불러왔던 러시아와 서방의 대결구도는 러시아에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푸틴은 당분간 국내 문제 해결에 주력할 것이다.”

―대외 정책의 기조도 바뀌지 않을 것인가.

“대체로 그렇게 본다. 서방과는 이슈별로 대응하면서 윤곽이 나올 것이다. 올해 열리는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과 나토 정상회담이 시험무대가 될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취임 이후 관계 재정립 단추를 누르긴 했지만 그 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푸틴은 매우 실용적인 리더이기 때문에 미국 대선이 끝나고 내년쯤에는 양국 관계에서 실질적인 진전을 얻으려 할 것이다.”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은 어떻게 될 것으로 보나.

“한반도 등 동북아에선 러시아의 독특한 지위를 강화하려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다. 올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선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를 통합하는 조정자 역할을 맡을 것이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시베리아 가스 공급 가스관 사업은 북한의 협력과 상업성이 확인되면 러시아가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

모스크바=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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