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위기 유럽 4개국 지금은…]<上>휘청이는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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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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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빚 GDP 112%… “비둘기 모이도 못준다” 아테네 곳곳 시위

극에 달한 정부불신
관료들 무능 - 부패에 실망…“애꿎은 서민들만 고통받아”

울상짓는 시장 거리

부활절 특수도 사라져…빵집주인 “매출 30% 줄어”

디폴트 현실화되나

공무원들까지 거리로 나서…유로존 지원 협상도 난항


지난달 24일 그리스 아테네 시의 북부 서민층 거주지에 있는 한 재래시장. 크리스마스 연휴와 함께 1년 중 최대 대목인 부활절 시즌이지만 상점마다 손님들이 뜸해 썰렁한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감자를 팔던 앙겔로스 타나소플로 씨(46)는 ‘그리스 정부의 재정건전성 확보 노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뜸 화부터 냈다. 그는 “정부가 재래시장에서도 영수증 제도를 의무화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며 “부자들은 놔두고 우리처럼 힘없는 서민들의 주머니를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변 상인과 손님들에게 “당신들도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느냐”고 하자 여기저기서 “그렇다”는 답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엘무 거리에는 고급 상점들이 줄지어 있지만 텅 비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스에서 30년 넘게 거주한 교민 마리아 김 씨(55·여)는 “그리스 국민들이 명절 선물과 휴가에 쓰는 비용을 줄이는 것은 처음 본다”며 “사태가 정말 심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현지에서 확인한 그리스 분위기는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을 당시의 한국을 보는 듯했다.

○ 극에 달한 정부와 공무원에 대한 불신

아테네 시 엘무 거리의 경제부 청사 앞. 재정위기로 인해 거리로 내몰린 공공기관 실직자들과 직원들이 이곳에서 정부를 성토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스 국영통신업체 OTE사의 자회사인 코스모테에서 근무하는 스티븐 팔타즈 씨(32)는 “정부의 엉터리 국가부채 관리로 왜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며 앞으로도 시위에 계속 참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와 공무원에 대한 반감은 엘리트 계층에도 퍼져 있었다. 그린 에너지 관련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크리스토스 코레스 사장(50)은 그리스의 관료주의를 ‘괴물(Monster)’이라고 표현하며 “그리스의 병든 관료주의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유럽의 주변국들은 그린산업에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데 풍부한 일조량과 풍력 기술 개발에 유리한 수많은 섬, 해변이 있는 그리스는 관광산업 외에는 이 자원을 전혀 활용하지 않을 정도로 정부가 무능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그리스는 말 그대로 국가 부도 직전의 상태다.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지원해 주지 않으면 5월 19일 만기가 돌아오는 100억 유로의 채무를 갚지 못해 국가 부도를 선언해야 할 상황이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112.6%에 이르는 국가채무를 감안하면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스 국민들을 만나 보니 더 큰 문제는 내부에 있는 듯했다. 국민들이 정부와 공무원을 극도로 불신하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내부 결집력’이 상실됐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EU 국가들이 그리스 지원을 망설이는 것도 이 같은 그리스 국내 분위기 때문이다. 그리스 정부의 구조조정 방안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아 애써 지원한 자금만 날리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다.

○ 경제위기로 비둘기도 배곯아

중산층이 주로 거주하는 아테네 시 네오코스모스 지역. 향긋한 빵 냄새가 나는 아담한 빵집 앞에 제법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주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빵집을 운영했다는 50대 초반의 아나 지아말키 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진열장이 꽉 차도록 빵을 만들었지만 요즘은 몇 개 진열대가 비게끔 만든다”며 “지난해 9월부터 매출이 30% 정도 줄었다”고 푸념했다.

빵을 사러 온 한 주부는 “예전에는 그날 산 빵은 그날에만 먹고 남는 건 버리거나 비둘기 모이로 던져줬는데 요즘은 보관해 뒀다가 그 다음 날에 먹는다”며 “요즘은 서민 못지않게 거리의 비둘기들도 생활이 어려워진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도 한다”고 말했다.

중산층까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시내 상가는 더욱 썰렁해졌다. 주부인 테오도르 브리지니 씨(50)는 “이미 물가가 오르고 있고 정리해고 움직임도 강해 서민들은 긴장하며 생활비를 아끼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 세계 경제의 또 다른 화산 그리스

그리스 공공노조는 22일부터 정부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네 번째 파업에 돌입했다. 정부청사는 물론 병원과 학교도 문을 닫는다. 아테네에서는 50만 명이 넘는 공무원이 집회에 참가할 계획이다. 그리스 재정위기는 과다한 공공부문의 지출과 제조업 비중이 낮은 산업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일어났다. 그리스 정부는 줄곧 공공부문 개혁을 내세웠지만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공무원은 오히려 5만 명이 늘었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15개 회원국과 IMF는 11일 그리스에 올해 450억 유로를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21일부터 2주간 구체적인 조건에 대한 협상에 들어갔다. 하지만 기오르고스 파파콘스탄티누 그리스 재무장관은 “적어도 3년 동안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유로존 지원책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또 구조조정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IMF 자금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여전히 미온적인 반응이다. 이렇게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그리스의 국가 부도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리스 문제는 이제 유럽 국가를 넘어 세계 경제 전체로 번질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IMF는 21일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4.2%로 1월 발표 때보다 0.3%포인트 올렸지만 유럽지역에 대해선 “그리스 사태와 관련한 국가채무 위기, 재정수지 적자로 인해 다른 지역보다 회복이 느릴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금융시장 일각에서 최근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에 이어 그리스 경제가 세계 경제를 위협할 또 다른 화산 분출구가 될 것”이라는 자극적인 발언이 나오는 것도 그만큼 파괴력이 크기 때문이다.

채석원 삼성증권 채권분석팀장은 “유로존이 단일 통화를 쓰면서 각국이 환율 정책을 펼칠 수 없는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않는 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국가들도 그리스와 같은 길을 갈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한국도 긴장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테네=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 포르투갈도 ‘부채의 함정’서 허우적
재정적자 급증하는데 저축률은 7.5% 수준

“재정위기 탈출 쉽지않다”
피치, 국가신용등급 낮춰
증세 고육책…국민은 반발


“포르투갈은 그리스와 다르다.”

조제 소크라트스 포르투갈 총리는 2월 초 공개석상에서 남유럽 ‘PIGS’ 국가들 가운데 포르투갈의 재정위험도가 그리스와 비슷한 상황이라는 분석에 대해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당시만 해도 포르투갈은 긴축재정을 통해 재정건전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포르투갈의 재정상태는 그리스 못지않게 부실해져 ‘부채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회의적 시각이 늘고 있다.

우선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2008년 2.6%에서 2009년 9.3%로 급등한 점이 계속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올해 재정적자 비율이 8.3%로 다소 낮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있지만 경기가 부진한 만큼 적자폭을 크게 줄이기는 쉽지 않다. 세금 수입보다 정부 지출이 많아 나라 곳간이 비어가는 데도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2.7%에 그쳤다.

더 큰 문제는 포르투갈의 저축률이 7.5% 수준으로 비슷한 재정위기를 겪는 스페인(20%)이나 이탈리아(17.5%)보다 크게 낮다는 점이다. 저축률이 낮으면 경제활동에 투입하거나 재정적자를 메울 자금을 자국 내에서 조달하기 어려워진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90%에 이르는 상황에서 외국 돈을 더 많이 빌린다면 국가 전체가 빚더미에 빠져 허덕일 수도 있다.

국제 신용평가회사인 피치는 지난달 포르투갈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췄다. 피치가 포르투갈의 신용등급을 내린 것은 1998년 이래 처음이다. 그만큼 포르투갈의 재정위기가 심각하고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국가신용도가 떨어지면서 포르투갈의 10년 만기 국채 이자율은 계속 상승세를 보여 최근 4%대 중반을 넘어섰다. 국채를 찍어 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재정문제가 심각해지자 포르투갈 정부는 지난달 고소득자에게 높은 세율을 매기고 세금감면 혜택을 줄이는 한편 공공투자예산을 축소하는 고강도 처방을 내놓았다. 실업수당을 줄이고 증권투자 수익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재정적자 비율을 2013년에 2.8%까지 낮추기 위해 포르투갈 정부가 국민들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는 정치적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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