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의 땅 아이티]“신음이라도 들려다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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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43개 구조팀, 시간과의 사투
‘한계점’ 만3일 지났지만 매몰자 구조 ‘기적’ 이어져
내무장관 “최대 20만명 사망” 구덩이에 시신 쏟아붓기도

“생지옥 현장, 하늘은 왜 이리 맑은지…”


이곳까지 오는 길은 멀었습니다. 15일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기아대책) 관계자들과 함께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미국∼푸에르토리코∼도미니카공화국을 거쳐 다시 육로로 이동해 이틀 만인 17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의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습니다. 하지만 그 눈부신 하늘 아래에는 차마 쳐다볼 수 없는 생지옥과 같은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 광경에 취재수첩을 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었습니다. 내 손을 잡은 현지인들의 눈에는 이젠 눈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를 살려 달라’는 절박한 아우성으로 가득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간절히 빌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습니다.》

아이티 강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최대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폴 앙투안 비앵네메 아이티 내무장관은 15일(현지 시간) “이번 지진으로 10만 명에서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7일 아이티 방문을 앞두고 기자들에게 “(아이티 지진 대참사는) 인류가 맞은 가장 심각한 위기이며 유엔에도 최악의 재난”이라고 말했다. 아이티에 대한 국제사회 공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18일 소집된다.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에 묻힌 사람이 목숨을 지탱할 수 있는 한계시간이라는 ‘만 3일(72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는 기적이 잇따르고 있다. 1분 1초가 아까운 세계 각국의 구조대는 ‘시간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기아대책 구호활동 시작
17일 오전 긴급구호에 나선 기아대책 관계자들이 아이티 ‘사랑의 교회’에서 어린이들에게 식수와 식량을 전달하고 있다.
기아대책 구호활동 시작
17일 오전 긴급구호에 나선 기아대책 관계자들이 아이티 ‘사랑의 교회’에서 어린이들에게 식수와 식량을 전달하고 있다.
17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도착한 기아대책 한국 관계자들은 이날 오전부터 현지에서 활동 중인 교민 선교사 등과 함께 본격적인 구호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생수와 라면 등 한국에서 가져간 응급식량을 굶주림에 지친 이재민들에게 나눠줬다. 기아대책 고영주 간사(29·여)는 “현지에 와서 보니 지진 참사의 실상이 뉴스로 듣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처참하다”며 “어려움에 처한 아이티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국 119국제구조대도 17일 오후부터 본격적인 구조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유엔은 세계 각국에서 온 43개 구조팀의 구조대원 1379명이 17일까지 매몰자 70여 명을 구조했다고 발표했다.

지진 발생 5일째인 16일 미국 버지니아 주 구조팀은 포르토프랭스대의 무너진 4층 건물 틈에서 생텔렌 장루이 씨(29·여)를 구해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구조팀은 전날 얼굴과 왼팔만 잔해 밖으로 겨우 내뻗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장루이 씨를 발견했다. 그의 왼팔에 포도당과 항생제를 주입한 뒤 30여 시간 동안 조심스럽게 그를 내리누르는 철근을 잘라내고, 콘크리트 더미를 잘게 부숴 걷어냈다. 구조작업 중에 여진이 발생해 잔해 더미가 내려앉을 위기도 있었지만 그는 매몰 97시간 만에 ‘지옥’에서 풀려났다.

17일에는 104시간 만에 한 60대 여성이 구조됐다. 포르토프랭스에서 남편과 함께 ‘몽타나 호텔’을 경영하던 나딘 카르도소 씨(62)는 투숙객 10여 명과 함께 12일 무너진 호텔 속에 갇혔다. 구조대가 며칠째 생존자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이날 오전 “살려 달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그의 아들이 들었다. 카르도소 씨는 심한 탈수 증상을 보이는 것 말고는 다행히 외상은 거의 없었다.

호주 ‘채널7’ 방송국 취재진은 15일 참사 현장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는 마을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5시간 동안 잔해를 파헤쳐 16개월 된 여아 위니 틸랭을 구해내 그의 삼촌에게 데려다 주었다. 틸랭이 매몰된 지 사흘 만이었다. 그러나 틸랭은 어머니를 잃었고 삼촌은 임신한 아내를 잃었다.

매몰자에게 행운이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반 총장은 16일 헤디 아나비 유엔 아이티안정화지원단(MINUSTAH) 단장(62·튀니지)의 시신이 포르토프랭스 MINUSTAH 본부 건물 잔해에서 다른 직원과 함께 발견됐다고 밝혔다.

물과 식량을 간절히 바라는 난민의 마음은 점점 황폐해지고 있다. 시신을 가득 실은 덤프트럭이 포르토프랭스 외곽 산악지대에 파놓은 큰 구덩이에 시신 수십 구를 쏟아 붓는 장면도 16일 미 CNN방송에 잡혔다. CNN 앵커 앤더슨 쿠퍼 씨는 현장에서 “지금 이곳에 인간성은 실종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시신을 묻을 곳이 없어 포르토프랭스 교외 마을에 시신을 유기하는 경우가 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마을 청년들이 자경대를 조직해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량을 검문하고 있다고 미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보도했다.

한편 구호물품 전달과 배포에 어려움을 겪자 일부 국가는 포르토프랭스 공항의 관제권을 쥔 미국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미국이 공항을 틀어쥐고 자국 시민을 대피시키는 데만 열중하기 때문에 구호물품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르토프랭스(아이티)=유성열 특파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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