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주민들, 장벽 넘으면서 ‘統獨’에 대해 발로 투표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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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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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치크 콜 전 총리의 보좌관 서면 인터뷰

독일 통일 20주년을 맞아 본보의 서면 인터뷰에 응한 호르스트 텔치크 전 헬무트 콜 독일 총리 외교안보보좌관.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독일 통일 20주년을 맞아 본보의 서면 인터뷰에 응한 호르스트 텔치크 전 헬무트 콜 독일 총리 외교안보보좌관.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독일 통일이 공산당 압제에 도전해 시위를 일으킨, 평범하지만 용감한 동독 주민들에 의해 시작된 것처럼 한반도 통일도 북한의 억압받는 주민들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의 외교안보보좌관을 지낸 호르스트 텔치크 씨는 8일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을 앞두고 동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텔치크 씨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로부터 1990년 10월 3일 통일까지 긴박했던 329일을 다룬 ‘329일-내부에서 본 통일’(1996년)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은 당시 내무장관으로 통일 협상을 이끈 볼프강 쇼이블레 현 독일 재무장관의 ‘조약-나는 통일을 어떻게 협상했나’(1991년)와 함께 독일 통일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필독서로 꼽힌다. 본보는 지난달 17일 쇼이블레 장관과의 인터뷰를 게재한 데 이어 독일 뮌헨에 거주하고 있는 텔치크 씨를 인터뷰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없었다면 통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독일 통일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1989년만 해도 그는 독일 통일에 찬성하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50년이나 100년 후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수차례 언급했다. 심지어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에도 콜 총리가 독일 의회 연설을 통해 발표한 10개조 통일안을 ‘일방적인 명령’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결국 몇 주 후인 1990년 2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콜 총리를 만나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이미 동독 주민의 과반수가 통일을 원하고 있고 수십만 명이 서독으로 달아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는 단지 현실을 인정한 것이었고 더는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동독에 배치된 35만 명의 소련군을 동원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됐다면 피의 대학살이 일어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독일이 당시 운이 좋았던 것인가.

“정말로 운이 좋았다. 통일은 아주 갑자기 일어났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1차적으로 고르바초프가 자기 나라에서 시작한 개혁 정책과 1989년 폴란드와 헝가리의 자유화에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이런 변화의 물결이 결국 동독으로 흘러들어갔고 1989년 10월 동독 전역에서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북한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정치국원이었던 귄터 샤보스키가 11월 9일 장벽이 무너진 날 기자회견에서 동독이 국경을 즉각 개방한다고 말한 것은 역사적 실수였나.

“SED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분명 큰 실수를 저질렀다. 왜냐하면 새로운 여행규칙은 사실 그 다음 날 발표될 예정이었는데 그 내용인즉 동독 주민은 우선 신청서를 제출하고 그 다음에 해외로 나가도록 허가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샤보스키 발표 때문에 동독 주민은 즉각 국경검문소로 몰려가 국경을 통과해버렸다. 동독 주민들이 주도권을 쥐고 성공으로 이끌었다.”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유혈사태가 시작됐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국경 경비대원 중 한 명이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유혈 대학살로 이어졌을 것이다. 다행히 국경경비대는 아주 이성적으로 행동했고 바리케이드를 치웠다.”

―베를린장벽 붕괴로부터 통일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왜 통일을 서둘렀나.

“콜 총리가 1989년 11월 21일 10개조 통일안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통일까지 5년에서 10년이 걸릴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동독 주민은 조속한 통일을 원하고 이를 압박했다. 1989년 주민 10만 명 이상이 서독으로 넘어갔다. 여기에 4만 명이 동독을 떠나겠다고 공식 신청서를 냈다. 1990년 초에도 매일 점점 더 많은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떠났다. 이런 식의 탈출은 동독으로서도 서독으로서도 지탱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동독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재정적으로 파산상태였다. 단지 콜 서독 정부만이 동독을 지원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고 결국 그 책임을 떠맡기로 한 것이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은 독일 통일이 일방적 흡수통일이라고 비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시위 도중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고 외치면서 통일을 먼저 요구한 것은 동독 주민이었다. 그들은 수만 명씩 서독으로 넘어가면서 이미 발로 투표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대안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동독은 파산상태였다. 누가 동독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그들의 빚을 갚아주고, 산업과 인프라를 현대화시켜 줄 수 있는지는 동독인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장벽 붕괴 20년 후 얼마나 많은 동독인이 통일에 만족한다고 생각하는가.

“여론조사에 따르면 3분의 2가 통독에 만족하고 3분의 1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동독에는 20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이 아직 남아있다. 그들은 모든 특권을 잃었다. 그들이 통일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 호르스트 텔치크는…


1940년 체코 슈테텐 출생 1945년 독일 바이에른 정착 1962∼1967년 베를린자유대에서 정치학 전공 1968∼1979년 베를린자유대 오토쥐르연구소에서 정치학 강의 1983∼1990년 헬무트 콜 총리 외교안보보좌관 1991∼1993년 베텔스만재단 총재 1993∼2000년 BMW 이사 2003∼2006년 보잉 독일법인 사장 1999∼2008년 뮌헨국제안보정책회의 의장 2009년 3∼9월 한독미디어대학원대 총장 현재 미국 뉴욕 외교관계위원회 국제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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