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악기는 무기보다 강하단다”

  • 입력 2009년 6월 2일 02시 59분


꿈키우는 팔 난민촌 음악학교
“폐허와 서방세계 잇는 다리”
거장들도 찾아와 레슨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과 부서진 벽돌집들…. 팔레스타인 웨스트뱅크(요르단 강 서안지구)에 살고 있는 달리아 무카르커 양(16)은 창문 밖을 내다볼 때마다 감옥에 갇힌 것처럼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3년 전 난민촌 음악학교에서 플루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신세계가 펼쳐졌다.

5남매가 살고 있는 비좁은 아파트에서 따로 연습실을 마련할 수 없었던 달리아는 화장실에서 연습을 했다. 끼니도 거른 채 플루트를 불다가 손목이 망가지기도 했다. 그렇게 3년여를 몰두한 끝에 그에겐 ‘초(超)현실’ 같은 일이 일어났다. 창문에 사진을 붙여놓고 꿈에도 그리던 우상 에마뉘엘 파후드(베를린필 플루트수석)에게 특별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파후드의 황금빛 플루트에서 울려나오는 현란한 장식음을 눈앞에서 듣는 순간 달리아는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마치 내가 날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현실이 추악할수록 음악이 데려가주는 또 다른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달리아가 살고 있는 웨스트뱅크에서는 지난달 31일에도 자치정부 경찰과 하마스 조직원들 간 총격으로 6명이 사망했다. 뉴욕타임스는 1일 최악의 경제난과 자살폭탄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곳에서 몇 년 전부터 바흐의 미뉴에트와 베토벤 소나타가 들려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웨스트뱅크 전역에서 바로크 페스티벌이 열렸고, 1월에 동예루살렘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피아노 콩쿠르에는 50명의 출전자가 열띤 경쟁을 벌였다. 난민촌에서 음악을 배운 학생들은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있다. 심지어 올해 초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자지구에서도 음악학교부터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클래식 음악 붐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부터이다. 아르헨티나 출신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계 세계적인 석학인 에드워드 사이드(2003년 사망)가 만든 ‘바렌보임-사이드 재단’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 재단은 2006년 팔레스타인 수도 라말라에서 음악교육센터를 만들고, 이스라엘과 아랍 청소년들을 모아 만든 ‘웨스트 이스트 디반 오케스트라’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또한 재단은 난민촌 아이들에게 무료로 현악기를 빌려주고 가르쳐주는 ‘알 카만자티’(바이올리니스트)그룹도 후원하고 있다. 2002년 설립 당시 학생 정원은 90명이었으나 현재 400명으로 늘어났다.

팔레스타인 내의 서구 클래식 음악 붐을 보는 보수적 이슬람주의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올해 3월 라말라 북쪽 제닌 마을에 있는 난민촌 음악학교는 방화를 당할 정도였다. 학생들이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위한 연주를 했다는 이유였다. 수하일 쿠리 팔레스타인 국립음악원 총장은 아랍-이스라엘 합동청소년 오케스트라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만일 한 사람의 발이 다른 사람의 목 위에 올려져 있다면 함께 노래할 수 있을 것인가”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바렌보임은 “오케스트라는 ‘정치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다”며 “음악이란 폭력과 추악함에 대항하는 최고의 무기”라고 옹호했다.

뉴욕타임스는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이 요원해 보이는 현실에서, 서구 클래식 음악을 배우는 것은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에게 외부 세계로 연결되는 더욱 빠른 길을 찾을 희망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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