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 때 빼앗긴 어머니를 돌려주세요”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3월 6일 02시 59분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 이르면 다음주 김현희 씨 만나

1978년 납북 ‘김현희 일본어선생’ 다구치 씨 아들 ‘눈물의 사모곡’


《“스물한 살이 돼서야 친엄마가 누구인지 알게 됐습니다. 지금도 북한에 살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김현희 씨를 만나면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직접 듣고 싶습니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북한명 이은혜) 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32) 씨는 엄마 얘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붉혔다.

이르면 다음 주 한국에서 김 씨를 만날 것으로 알려진 그를 4일 일본 도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범인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던 김 씨는 북한에서 다구치 씨에게 일본어를 배우면서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다.》

“‘네 엄마는 따로 있다’아버지로 알았던 외삼촌 스물한살 때 진실 알려줘 / 엄마의 기억 하나 없지만 31년전 빛바랜 가족사진 늘 가슴속에 품고 살아 / 숨졌다는 北주장 안믿어 한국 가서 金씨 만나면 엄마 얘기 실컷 듣고 싶어”

마지막 가족사진과 모자 수첩다구치 야에코 씨가 납치되기 전인 1978년 어느 날 도쿄 자택에서 이웃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왼쪽). 왼쪽이 다구치 씨, 정면 가운데 줄무늬 상의를 입은 아이가 딸(당시 3세), 안겨 있는 아이가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 씨(당시 1세). 다른 사람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다구치 씨와 아들 이즈카 씨의 이름이 적혀 있는(빨간 점선 안) 모자건강수첩. 이즈카 씨는 다음 주 김현희 씨를 만날 때 이 수첩을 가져갈 계획이다. 사진 제공 이즈카 시게오 씨
마지막 가족사진과 모자 수첩
다구치 야에코 씨가 납치되기 전인 1978년 어느 날 도쿄 자택에서 이웃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왼쪽). 왼쪽이 다구치 씨, 정면 가운데 줄무늬 상의를 입은 아이가 딸(당시 3세), 안겨 있는 아이가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 씨(당시 1세). 다른 사람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다구치 씨와 아들 이즈카 씨의 이름이 적혀 있는(빨간 점선 안) 모자건강수첩. 이즈카 씨는 다음 주 김현희 씨를 만날 때 이 수첩을 가져갈 계획이다. 사진 제공 이즈카 시게오 씨

이혼 후 혼자 두 자녀를 키우던 다구치 씨가 종적을 감춘 것은 1978년 6월. 이즈카 씨와 두 살 위인 그의 누나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그의 나이 한 살 때였다. 이즈카 씨는 외삼촌 이즈카 시게오(飯塚繁雄·현재 납치피해자가족회 대표) 씨의 양자로 입적됐고, 누나는 이모(다구치 씨의 언니)가 맡았다.

외삼촌은 그가 양자라는 사실을 숨겼다. 어린 나이에 충격을 받을 것을 염려해서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외삼촌 외숙모 고모 사촌 등 온 식구가 함구했다. 무려 20년 동안.

누나는 어렴풋한 기억이 남아 있어 친엄마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지만, 누나조차 그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다.

진실은 스물한 살 가을에 갑자기 찾아왔다. 1998년 미국 출장을 위해 여권을 만드는 과정에서 호적등본에 ‘양자’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던 것.

“충격이었습니다.”

그 직후 외삼촌은 “사실 네 엄마는 따로 있다. 북한에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가 친엄마다”라고 말해줬다.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그가 세상을 향해 “내가 다구치 씨의 친아들입니다. 납치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십시오”라고 외치기까지는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그동안 남모를 눈물을 흘리며 설움을 삭이고 또 삭였다.

사실 그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다. 사진이나 김현희 씨의 책을 통해 엄마를 접한 게 전부다. 그래서 김 씨와의 만남을 무척 기대하고 있다. 엄마가 그를 뱃속에 품고 있던 때에 만들었던 모자 건강수첩과 탯줄도 함께 갖고 가겠다고 했다. 자신과 엄마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헤어진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그는 엄마가 납치되기 수개월 전에 함께 찍었던 빛바랜 가족사진을 늘 품에 안고 있다.

그는 엄마가 1986년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북한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북한이 제시한 교통사고 조사서에는 엄마 이름도 없고 절반이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귀국한 납치 피해자 중에는 1986년 이후 엄마를 본 사람도 있다”는 게 그 이유다.

2004년에야 ‘엄마의 아들’임을 밝힌 데 대해 그는 “6자회담에서 납치 문제가 진척이 안 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에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때부터 그는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개 활동에 적극 나섰다.

그해 김현희 씨를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일본 외무성을 통해 부치기도 했다. 하지만 편지가 김 씨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는 믿고 있다.

그는 “헤어져 살아야 하는 납치 피해자 가족의 애환에 귀 기울여 달라”며 한국 국민의 관심을 촉구했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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