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으로서 내 이념은 진보도 보수도 아닌 헌법수호 정신”

  • 입력 2009년 1월 28일 02시 59분


샌드라 데이 오코너 전 미국 대법관은 2006년 퇴임 후에도 워싱턴 대법원 청사 내에 원로 법관으로서 사무실을 갖고 있다. 남편이 건강하던 시절 찍은 부부 사진이 바로 뒤에 보인다. 남편 간병을 위해 종신직인 대법관을 사임한 그는 “남편은 나를 위해 50년 이상 희생해 왔다”며 “대법관 사임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샌드라 데이 오코너 전 미국 대법관은 2006년 퇴임 후에도 워싱턴 대법원 청사 내에 원로 법관으로서 사무실을 갖고 있다. 남편이 건강하던 시절 찍은 부부 사진이 바로 뒤에 보인다. 남편 간병을 위해 종신직인 대법관을 사임한 그는 “남편은 나를 위해 50년 이상 희생해 왔다”며 “대법관 사임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美 첫 여성대법관 지낸 샌드라 데이 오코너

《22일 오후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연방대법원 4층에서 만난 샌드라 데이 오코너 전 대법관의 얼굴은 인자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쳤다. 집무실 앞에까지 나와 동아일보 취재진을 다정하게 맞이한 오코너 전 대법관은 79세라는 나이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면서도 자신감이 있었다. 텍사스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에서 자란 그의 사무실은 고향을 상징하는 듯 서부의 대자연을 담은 사진으로 가득했다. 의자 가까이에는 남편 존 오코너 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오코너 전 대법관은 알츠하이머병(노인성 치매)에 걸린 남편을 돌보기 위해 2006년 1월 종신직인 대법관 직을 자진 사임했다. 》

오코너 전 대법관은 이틀 전(20일)에 열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는 영하 10도의 강추위 속에서도 의사당 연단에서 취임식을 직접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은 미국이 1862년 노예해방을 선언해놓고도 특정 영역에서 흑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를 없앤 사건이다. 오랜 시일이 걸렸지만 미국 사회가 가진 흑인에 대한 ‘마지막 장벽’을 무너뜨린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의 대법관 시절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진보와 보수로 확연히 나누어진 다른 8명 대법관 사이에서 이념에 좌우되지 않는 결정을 내려 한때 미국 대법원은 ‘오코너의 법원’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논란이 되는 이슈에 대한 판단 근거는 무엇으로 삼고 있나.

“대법관이 될 때 하는 직무선서가 있다. ‘(나는) 미국의 헌법을 수호하고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능력이 닿는 한 최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엄숙히 선서한다. 그러니 신이여 도와주소서’라는 내용이다. 이 정신이야말로 내가 평생 법조인으로 살면서 수많은 판결과 결정을 내릴 때 지키고자 했던 최고 기준이다.”

―2000년 대선 당시 플로리다 재검표 논란이 벌어졌을 때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판결도 많이 내렸는데….

“대법관은 종신직이다. 내가 법관의 품위를 어겨 탄핵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통령이라 해도 대법관의 직무를 종료시킬 수 없다. 나는 선거로 선출된 사람도 아니고 정치인처럼 선거구민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사법이 정치의 영역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정치적인 사안이라 해도 법률적 판단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다면 예외다. 플로리다 재검표 논란이 바로 그 경우였다.”

―스스로의 이념 지향을 밝힌다면….

“나의 이념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미국의 헌정질서와 가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 우대 같은 민감한 판단을 요구받을 때도 있고 법관들 사이에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헌법적 판단’하에서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사법 독립의 가장 큰 저해 요인은 무엇인가.

“교육의 부재다. 삼권분립이나 사법부의 중요성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 행정권력이나 입법권이 사법권을 침해해도 국민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여성들의 법조계 진출도 눈부시다. 미국 최초 여성 대법관으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일에 대해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잘해야 하고 열심히 해야 하고, 그리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 역시 젊은 날 차별받았던 일화도 소개했다.

(스탠퍼드) 로스쿨(법학대학원)을 졸업할 때 캘리포니아의 수많은 로펌이 학교에 변호사 모집 벽보를 붙였지만 여성을 찾는 곳은 없었다. 친구 아버지가 유명 법률회사 파트너여서 부탁해 면접을 보았다. 정작 질문이 ‘타자를 잘 치느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채용 보장이 아니라 혹시 비서 일을 맡겨도 잘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그는 로스쿨을 수석 졸업했지만 정식 변호사 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좌절하는 대신 카운티(한국의 군·郡에 해당) 검사실에서 무급으로 부(副)검사로 일했으며 지역민을 위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등 비주류 코스를 개척했다. 그 결과 법조계 주류에 당당히 진입할 수 있었다.

오코너 전 대법관은 “졸업 당시 로스쿨 여성 비율은 1%에도 못 미쳤지만 지금은 52%”라며 “내가 대법관에 지명된 건 (개인의 영광을 넘어) 혁명적인 것이었다. 여성도 고위직을 해낼 수 있음을 보여줘 기회의 문을 넓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임할 때 미련은 없었나.

“결단코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남편은 나를 위해 50년 이상 희생해 왔고 이제는 그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안타깝게도 존(남편)은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

로스쿨 재학 시절 만난 남편은 1990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기 전까지 워싱턴과 캘리포니아 로펌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일했다.

―지난해 가을 한국 헌법재판소 창립 20주년 기념 세미나에 참석하려다 건강상의 이유로 취소했다. 한국에 와서 전하고 싶었던 말을 이 자리에서 소개해준다면….

“어떤 민주주의라도 올바른 사법시스템을 갖는 것은 필수적이다. 공정하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법질서를 갖는 것이야말로 민주시민의 당연한 권리다. 한국의 사법부가 이 같은 노력을 해 온 것을 높이 평가한다.”

―사법부 권위의 훼손이 한국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사법부 권위는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판사들이 (오랜 기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공정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법의 잣대를 제시해야 한다.”

―은퇴 후에도 이라크연구그룹(ISG)이나 차기 행정부 외교정책 방향을 제시한 스마트파워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공인으로서 사회에 지고 있는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서부로 진출한 우리의 선조들이 깨달은 삶의 방식은 주변인들과 협력하고 이웃을 돌보면서 전진해 가는 것이었다. 나 역시도 내 힘이 닿는 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이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오코너가 사례로 든 ‘사법부 존중 전통’

1954년 美대법 “흑백인종 분리교육은 위헌” 판결

아이젠하워, 불만있었지만 軍동원 흑인등교 보장

샌드라 데이 오코너 전 대법관은 “권위 있는 사법 시스템이야말로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에서든 가장 핵심 요소”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오코너 전 대법관은 “미국의 경우 다행히도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곤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법원 판결을 존중하고 따랐다”며 1954년 대법원의 흑백 학생 분리 위헌 판결에 대처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예를 들었다.

‘브라운 대(對) 교육위원회’ 사건으로 불리는 이 판결은 공립학교에서 흑백 학생을 분리해 가르치는 것을 위헌이라고 한 것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튿날 바로 워싱턴 시 당국에 흑백 통합학교 모델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판결을 실행할 민권법을 1957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아칸소 주 리틀록 시 인종분리주의자들은 백인 학교에 흑인 학생들이 등교하는 것을 봉쇄하며 시위를 벌였고, 주지사는 학교 문 앞에 서서 ‘어떤 흑인 아이도 들여보낼 수 없다’며 주 방위군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보호했다.

이에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을 해방시켰던 공수부대까지 보내 주방위군을 제압하고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보장했다. 오코노 전 대법관은 “사실 당시 분위기로는 대통령 스스로도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 있지만, 법원이 결정했으므로 존중하고 따르는 이 나라의 문화를 따랐다”고 말했다.

오코너 전 대법관은 “법원의 권위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공정한 판결의 기록을 쌓아가면서 스스로 획득해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 前대법관은

▶1930년 미국 텍사스 주 엘패소 출생, 아칸소 주에서 성장 ▶스탠퍼드대 경제학과를 거쳐 법학대학원 최우등 졸업 ▶캘리포니아 지역 카운티 부(副)검사, 피닉스 지역 법률사무소 운영 등을 거쳐 1965년 애리조나 주 검찰차장 ▶1969년 애리조나 주 상원의원, 상원의장(1973∼1975년) ▶애리조나 주 항소법원 판사 재직 중인 1981년 대법관(종신직) 지명 ▶2006년 1월 사임. 4월 명문 ‘윌리엄 앤드 메리대’ 학장(명예직) 취임. 2004년 포브스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6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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