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역사를 새로 쓰다]<1>벽을 넘어서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11월 6일 02시 58분



“이제 모든 게 가능한 세상이…” 울음 터뜨린 흑인들

1863년 ‘링컨 노예해방 선언’ 145년만에 완결 지어

45년전 ‘그날이 오면…’ 킹목사의 꿈 극적으로 실현

한국 교민사회, 무관심 접고 활발한 정치참여 예상


1960년대 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주재 미국대사관.

어머니를 따라 대사관 내 작은 도서관에서 잡지를 뒤적이던 미국인 소년 배리는 ‘라이프’지에서 한 흑인의 사진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피부를 탈색하려다 얼굴이 심하게 망가진 흑인들을 다룬 특집 기사였다.

그날 밤 배리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상념에 잠긴다. ‘(피부색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후 근 40년이 흐른 2008년 11월 4일, 그 소년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흑인 소년소녀와 백인 소년소녀가 팔짱을 끼고 형제자매처럼 걷는 그날이 오리라”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꿈’(1963년 연설)을 구현하면서 미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물론 그의 이름은 이제 미국식 이름 ‘배리’가 아니라 케냐 출신 아버지가 지어준 버락 후세인 오바마다.

그를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등극시킨 ‘2008 미국의 선택’은 미국 사회가 숙명처럼 안고 있는 인종 편견이란 허물을 넘어서기 위한 ‘지난(至難)한 제의(祭儀)’였다.

1964년 민권법 제정으로 차별이 제도적으로 금지됐지만 흑백갈등은 여전히 사회 곳곳을 무겁게 짓눌러 온 고질이었다. 인종차별의 뉘앙스만 풍겨도 처벌을 받을 만큼 민감한 분위기지만 사회·경제적 힘의 차이에 의한 보이지 않는 벽은 엄존했다.

정치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은 항상 백인들의 차지였다. 유권자 비율이 12%에 불과한 흑인이 그 정점에 올라선다는 것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흑인대통령의 탄생은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의 완결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4일 밤과 5일 새벽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흑인이 “이제 모든 게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도 그동안의 설움이 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오바마 대통령 탄생이 곧바로 인종 문제의 해결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흑인 사회에 만연한 빈곤의 악순환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4일 밤 일부 매케인 지지자가 표출한 노골적 거부감이 보여주듯 인종적 편견에 젖은 사람도 많이 있다. 지속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의 성공은 명문 사립중고교와 명문대를 졸업한 ‘유별나게 뛰어난 흑인 젊은이’의 아메리칸 드림 성취기에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이 소수의 정치지도자나 지식인들이 주도해 만든 작품이 아니라 광범위한 시민사회의 풀뿌리 운동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그 어떤 역풍으로도 되돌리기 힘들 만큼 미국의 역사를 한 걸음 전진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사실 지난 10개월간 선거운동 현장을 가 보면 운집한 오바마 후보 지지자들은 다른 후보 지지 그룹에 비해 거의 조직이 없는 평범한 민초들이었다.

오바마 당선인은 이 민초들 내부에서 쌓이고 쌓인 변화에의 욕구를 ‘변화’와 ‘통합’이란 깃발로 묶어냈고 여기에 ‘신이 점지한 절묘한 기회’(릭 워런 목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우호적인 제반 조건이 그를 도왔다.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이라는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하느라 국론은 분열되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사상 최악의 금융위기는 선거를 ‘오바마 대 매케인’의 대결이 아닌 ‘조지 W 부시에 대한 심판’으로 만들었다.

오바마 후보의 당선은 미국호(號)의 진행 방향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로널드 레이건 시대 이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돼 온 사회복지, 빈곤 문제에 더 많은 방점이 두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외교적으로도 하드파워에 기반을 둔 일방주의 대신 소프트파워 시대로 선회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변화의 물결을 이념적 잣대로 해석하는 건 현재 미국 사회의 변화 욕구를 겉핥기로 읽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오바마 지지 풀뿌리 운동을 펴 온 뉴욕·뉴저지유권자센터 김동석 소장은 “‘오바마 대통령’은 이념의 틀을 갖고 있는 정치집단이 전략적으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변화와 통합을 바라는 국민의 염원이 구현돼 낳은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오바마 당선인은 정치인생을 시작할 당시 민권운동 그룹에 뿌리를 뒀지만 최근 수년간 통합과 탈(脫)이념, 실용 노선을 분명히 해 왔다.

오바마 시대는 한인 교포들의 정치 참여에도 큰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전망된다.

선거과정에서 한인 1.5∼3세대들은 ‘열풍’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적극적으로 지지활동을 벌였다. 김 소장은 “백인 주류사회가 주도해 온 정치에 무관심했던 교민사회의 정치참여가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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