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 선 美 외교 정책

  • 입력 2008년 8월 20일 02시 59분


민주 확산이냐…파키스탄 그루지야 민주-서방편입 지원 약속

눈앞 국익이냐…‘對테러전 협력-對러 관계’ 두 토끼잡기 고민

“무샤라프 장군(대통령)에게 내 말을 전해 달라. 우리 편이 될 것인지, 적이 될 것인지 양자택일하라고.”

9·11테러 다음 날인 2001년 9월 12일 미국 워싱턴 국무부 청사.

리처드 아미티지 당시 국무부 부장관은 마무드 아마드 파키스탄 정보국(ISI) 국장에게 “회색(중간지대)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드 국장은 당시 우연히 미국을 방문 중이었다.

다음 날 오후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의 통화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근 7년. 무샤라프 정부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핵심 파트너였고, 미국은 무려 100억 달러를 원조하며 화답했다.

그러나 유혈 쿠데타로 집권해 정통성이 취약한 무샤라프 정권과의 밀월은 미국 외교의 최대 치부이기도 했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확산을 외교의 핵심 원칙으로 삼겠다”고 공언한 부시 대통령의 다짐을 식언으로 비치게 만드는 대표적 사례였기 때문이다.

그 무샤라프 대통령이 18일 사임함으로써 미국 외교는 새로운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맞게 됐다.

특히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과 존 매케인 상원의원 중 누가 당선되든 내년 1월 취임할 새 대통령에게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가장 어려운 외교적 과제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루지야 문제도 마찬가지다.

두 이슈 모두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가치를 우선해야 할지, 미국의 이익과 현실적 역학관계를 우선해야 할지 까다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18일 성명에서 “무샤라프 대통령은 테러, 극단주의와의 전쟁에서 가장 헌신적인 파트너 중 한 명이었다”며 감사를 표하면서 동시에 파키스탄 새 정부와의 협력 의지를 강조했다.

물론 파키스탄 정부는 당분간 기존의 대미 정책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국방전문가인 아에샤 시디카 씨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 집권연정이 이슬람 무장세력에 대해 대화와 군사작전을 병행하는 기존 정책을 계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테러와의 전쟁에 핵심 당사자로 참여하는 것을 꺼릴 가능성이 크다. 워낙 국내적으로 반미감정이 드센 상황이어서 연정 자체의 기반을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레반 전문가인 아메드 라시드 씨는 “집권연정의 정책이 중구난방으로 갈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영국 BBC방송은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 암살 사건이 보여주듯 파키스탄은 극단주의 테러리즘의 희생자인 동시에 테러 세력의 후원자이자 은신처다. 누가 누구 편인지 구분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사실 파키스탄 정보국이 탈레반을 돕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여겨진다.

이런 현실에서 차기 미국 대통령은 파키스탄의 민주화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서 달라고 설득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샤라프 정권 시절의 강력한 리더십, 무조건적인 협력에 향수를 느끼게 될 것이다.

최근 그루지야 사태에서 드러난 ‘옛 소련 국가들의 서방 편입 욕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차기 미국 대통령의 어려운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방의 자유민주주의 깃발 아래로 편입되겠다는 욕구를 적극 지원할 경우 러시아를 지나치게 자극해 신냉전 구도가 심화될 수 있다. 반면에 달가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일 경우 자유민주주의 확산이란 외교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 이래저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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