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신은 늦었지만 답신은 뜨거웠다

  • 입력 2008년 1월 17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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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에번스 전 미국 하원의원이 지난해 말 일리노이 주의 한 요양소에서 한국 정부가 수여한 수교훈장 광화장을 1년 1개월 만에 전달받았다. 파킨슨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이날 몸이 불편한 가운데도 한국에 대한 깊은 우정을 표현하려 애썼다.
레인 에번스 전 미국 하원의원이 지난해 말 일리노이 주의 한 요양소에서 한국 정부가 수여한 수교훈장 광화장을 1년 1개월 만에 전달받았다. 파킨슨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이날 몸이 불편한 가운데도 한국에 대한 깊은 우정을 표현하려 애썼다.
파킨슨병 ‘한국인의 친구’에게 13개월 걸려 전달된 공로훈장

《"(북한) 핵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지난달말 미국 시카고에서 서쪽으로 260km 가량 떨어진 일리노이주 록아일랜드 카운티의 작은 요양소.

2006년말 은퇴후 처음으로 한국인 방문객을 맞은 '한국인의 친구'의 표정엔 반가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말을 이어가는게 힘든 듯 한겨울 날씨에도 얼굴엔 진땀이 흘렀다.

레인 에번스(56) 전 연방하원의원. 미 의회에서 일본군위안부 강제 동원문제를 이슈화한 주역이자 손꼽히는 '인권정치인'이었던 그는 이날 뒤늦게 전달된 한국 정부의 훈장을 어루만지며 한국에 대한 애정과 감사의 뜻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

이 훈장은 그가 24년간 연방 하원의원으로 일하면서 한인을 비롯한 소수민족과 약자의 인권을 위해 헌신해 온 공로를 인정해 한국 정부가 2006년 11월 수여한 수교훈장 광화장이다.

그러나 외국 국가원수에게 수여되는 수교훈장 광화대장에 이어 가장 영예로운 이 훈장이주인에게 전달되기까지는 1년1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에번스 전의원은 파킨스병 악화로 2006년 연말부터 사실상 외부와 연락이 두절됐다.

그해말 공식 은퇴해 고향인 일리노이주로 내려간 그는 낮에 간병인만 들르는 요양소에서 힘겹고 외로운 투병생활을 했다. 법률대리인으로 등록한 동생 등은 병세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외부인의 접촉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중반 바뀐 새 법률대리인들은 훈장을 전달하고 싶다는 한국 정부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였고 병세를 봐가며 훈장 전달식 시기를 저울질해왔다.

마침내 이날 요양소 면회실에서 열린 훈장 전달식은 간소했지만 진지했다.

에번스 전의원은 김은석 주미대사관 의회담당 공사참사관에게서 훈장을 전달받은뒤 "고맙다. 이 먼데까지 와줘서"란 말을 거듭했다. 옆에 있던 간병인과 법률대리인인 변호사가 박수를 쳐줬다. 김 공사참사관은 에번스 전의원의 현역시절 위안부 결의안과 비자면제협정 등을 위해 보이지 않게 움직이며 도운 '숨은 공신'이다.

에번스 전의원은 지난해 6월 의회를 통과한 위안부 결의안에 대해 말을 꺼냈다.

"캘리포니아 출신 젠틀맨이 노력해서 잘 됐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젠틀맨'은 에번스 결의안의 바통을 이어받아 지난해 결의안 상정을 주도한 마이클 혼다 의원을 지칭한 것이다. 에번스 전의원은 1999년 의회 의사록에 처음으로 종군위안부 문제를 기록으로 남겼고 2000년부터 2006년까지 5차례에 걸쳐 결의안을 발의했다.

말하는 것 조차 힘겨워하는걸 보다못한 간병인 등이 "이제 말씀은 그만 하셔도 된다"며 말렸지만 에번스 전의원은 북한 핵문제에도 기여하고 싶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그는 12선 의원을 지냈지만 워낙 청렴했던 탓에 모아 놓은 재산도 별로 없다. 의원재임시 특혜를 받지 않겠다며 연금도 받지 않겠다고 반납 신청을 했다. 나중에 의회사무국에서 퇴임 2년전부터라도 소급해 받으라고 요청해 2년간의 재임에 대해서만 연금을 받고 있다. 주변에서 도움을 청하면 힘에 부쳐도 거절할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해병대 출신으로 조지타운대 법과대학원을 졸업하고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약관 31세에 일리노이주 제17 선거구에서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된 그는 밤을 새워 일해도 지칠줄 모르는 건강한 사람이었으나 1995년경부터 파킨스병 증세를 보였다.

에번스 전의원의 현역시절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위해 협력하며 우정을 나눴던 서옥자(워싱턴바이블컬리지 교수) 워싱턴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회장은 "에번스 전의원과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가 놀라운 의지로 병을 이겨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위안부 결의안 추진과정, 에번스 전의원과의 사연 등을 담은 책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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