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로 돌아가라” 성난 파리지앵

  • 동아일보
  • 입력 2007년 11월 20일 03시 00분


영하 기온속 1만여명 행진… 파업시위자보다 많아

구경꾼 박수로 동참… ‘개혁만이 살길’ 플래카드도


18일 프랑스 수도 파리의 레퓌블리크 광장.

“철도원들, 업무로 돌아가라(cheminots au boulot)” “피용 총리, 잘 버텨요(Fillon, tiens bon)”.

약 1만 명의 시민들이 나시옹 광장 쪽으로 행진하며 파업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슈미노/오 불로’ ‘피∼용/티앙 봉’. 프랑스말로는 운율이 맞아 저절로 입에 붙는다.

이날 파리도 처음으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얼음이 얼었다. 파업으로 지하철과 버스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시위대 측은 참가자가 2만 명까지 될 것으로 추산했다.

기자는 앞서 파업 첫날인 14일 몽파르나스역 앞에 모였던 파업지지 노조와 학생들의 모임도 지켜보았다. 많은 확성기 차량이 동원되고 많은 깃발이 바람에 날렸지만 단 2000명 정도만 모였다.

무기한 파업을 선언한 이들의 모임치고는 초라했다. 노동총동맹(CGT), 프랑스전국학생연맹(Unef) 등 프랑스에서 가장 잘 조직됐다는 집단이 주도한 시위였는데도 그랬다. 이들보다 적어도 5배나 많은 사람이 파업 5일째인 18일 파업 반대 시위에 모인 것이다.

대부분 TV와 신문, 인터넷을 보고 제 발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봉쇄 반대 학생들이 끌고 나온 확성기 차량이 한 대 있었지만 시위는 몇몇 선동가들에 끌려가지 않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시위대는 거리를 따라 움직이면서 끊임없이 환호와 함성을 터뜨렸다. 시민들이 건물 베란다에 나와 시위에 지지를 표시하는 데 고무됐다. 누군가 베란다에서 박수를 치거나 지지의 뜻으로 국기를 내걸 때마다 함성과 구호가 터져 나왔다.

‘시위를 선동하는 사람’은 바로 이들과 같은 평범한 시민이었다. 이렇게 터지는 함성과 구호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시위대와 시위를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이 통했다는 느낌이 드는, 보기 드문 시위 광경이었다.

노조와 학생들의 모임에 등장하는 ‘투쟁(lutter)’ 같은 살벌한 단어는 없었다. 그러나 ‘민간이 공기업의 젖을 짜는 암소냐. 특혜를 중단하라’ ‘봉쇄, 그 파쇼적인 짓을 그만두라’고 쓰인 플래카드에선 침묵하던 다수의 분노가 감지됐다.

‘프랑스가 늙어가고 있다. 개혁만이 살길이다’라는 글에는 다급한 현실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제발 일 좀 하게 해 달라’는 호소도 나왔고 ‘파리교통공사(RATP)=걸어서 집에 돌아가는 것(Rentre avec tes pieds)’이라는 풍자도 등장했다.

봉쇄 반대 학생이 1968년 이른바 ‘5월 혁명’의 구호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를 본떠 ‘공부를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플래카드를 써 가지고 나온 것이 눈길을 끌었다.

한 젊은 아빠가 무동 태운 아이의 목에는 ‘아빠가 피곤해요’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이 아빠는 “차가 막혀 출퇴근 하는 데만 무려 6시간이 걸린다”고 푸념했다.

지난주 파리 톨비아크에 위치한 파리1대학 학생 총회에서는 학생 75%가 봉쇄에 반대했다. 톨비아크 파리1대학은 지난해 최초고용계약법(CPE) 반대 시위를 선두에서 이끈 인문계 중심의 학교다. 이 학교에서마저 봉쇄파가 소수로 전락했다.

이미 파업파와 봉쇄파는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론조사뿐만 아니라 거리나 학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