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지향]아일랜드와 한국

  • 입력 2007년 10월 17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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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남북 정상회담을 보는 내내 ‘지구상에 남은 또 하나의 분단국가’라 해도 좋을 아일랜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일랜드와 우리는 참 많이 닮았다. 우선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한반도나, 서쪽 끝에 있는 아일랜드 섬이나 변두리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강대국 옆에서 겪은 고난의 역사도 흡사하다. 아일랜드는 우리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을 영국의 식민지로 지냈다. 그런 역사가 낳은 국민적 심성도 닮았다. 자신들을 세상에서 가장 고난받은 민족, 가장 슬픈 민족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한(恨)이 우리에게도, 저들에게도 흐른다. 민족주의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도 같다. 지지리도 못살고 가난하던 과거를 떨쳐 버리고 단기간에 경제 성장의 기적을 이룬 사실까지 닮았다.

한데 요즘은 다른 점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우선 아일랜드는 우리처럼 이데올로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한때는 아일랜드에서도 민족주의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제 실용주의가 이데올로기를 대체했다. 국민은 더 많은 일자리와 부(富)가 ‘영광스러운 가난’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혁명적인 변화였다. 오랜 식민지 경험 때문에 아일랜드 국민은 ‘자립’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가치로 믿었고, 외국자본에 의한 경제 성장을 치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실업률이 17%에 이르자 정부는 죽기 살기로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는 가장 가난하고 외떨어진 나라에서 가장 세계화된 나라로 한달음에 내달았다. 1970∼2000년 아일랜드의 수출은 20배, 수입은 8배로 늘었다.

분단-고난의 역사 ‘닮은꼴’

아일랜드 경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경제로 평가되며, 국민의 3분의 2는 ‘세계화는 위협이 아니라 기회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아일랜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실업을 현명하게 이용하여 구태를 떨쳐 버리고 유럽 최고의 생활수준을 이루어 낸 것이다. 우리는 실업률이 그 정도로 높지 않아서 자극이 부족한 걸까. 우리의 경우 분배와 평등의 왜곡된 이데올로기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으며, 세계 10위권의 무역국이면서도 세계화라는 단어가 마치 전염병이라도 되는 양 질겁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아일랜드는 예전 식민 지배국의 1인당 국민소득을 뛰어넘었지만 우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아직도 우리보다 두 배 가까이 잘사는 나라다. 경제 성장을 이루자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 사람들의 미움도 거의 가셨다. 2005년의 조사에서 아일랜드 국민의 60%가 영국을 ‘가장 통하는’ 나라로 생각하며 두 나라 관계가 좋거나, 대단히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엔 일본이라면 혈압이 높아지는 사람이 여전히 너무 많다.

마지막으로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제 통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우리와 확연히 다르다. 가난하고 불행하던 시절에는 통일을 지상 목표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배부르고 등 따스워지자 짐만 될 것 같은 북녘 동포들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통일을 위해 살인도 마다 않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총성도 멈추었고, 남쪽 주민들은 아일랜드 섬의 정치적 통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현재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세 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첫째는 현상 유지이고, 둘째는 통일이다. 마지막은 영국과도, 아일랜드공화국과도 관계가 없는 독립적 정체(政體)의 구성인데, 이 마지막 방안이 실은 영국이나 아일랜드가 암암리에 원하는 해법이다. 영국은 ‘저 섬이 대서양 한가운데로 떠내려가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심정으로 북아일랜드를 떨쳐 버리길 원하고, 아일랜드공화국 역시 부담만 될 것이 뻔한 북아일랜드를 넘겨받기를 꺼린다.

한국과 달리 통일에 연연 안 해

전혀 다른 체제와 환경 속에서 60여 년을 살았으면서도 아직도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만으로 통일을 갈구하는 한(韓)민족의 순수함과 비교할 때 요즘의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악해 보이기조차 한다. 재미있는 것은 아일랜드 국민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민족 지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이 변한 것이다. 마지막 남은 또 하나의 분단국가 아일랜드의 경우다.

박지향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서양사 jihangp@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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