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얼굴에 침 뱉을때 그 기분 아느냐” 적개심 표출

  • 입력 2007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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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의 범인 조승희가 사건 당일 미국 NBC 방송사에 보내 18일 공개된 사진들. 태연히 미소를 짓고 있는 범인의 모습(사진 ①),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범인(②), 수십 개의 총알을 가지런히 정렬해 놓고 찍어 범인의 편집광적 내면을 보여 주는 것(③), 카메라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모습(④). NBC 앵커맨 브라이언 윌리엄스 씨가 들어 보인 우편물 봉투(⑤). 워싱턴·뉴욕=EPA 로이터 AFP 연합뉴스
버지니아공대 총격 사건의 범인 조승희가 사건 당일 미국 NBC 방송사에 보내 18일 공개된 사진들. 태연히 미소를 짓고 있는 범인의 모습(사진 ①),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범인(②), 수십 개의 총알을 가지런히 정렬해 놓고 찍어 범인의 편집광적 내면을 보여 주는 것(③), 카메라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모습(④). NBC 앵커맨 브라이언 윌리엄스 씨가 들어 보인 우편물 봉투(⑤). 워싱턴·뉴욕=EPA 로이터 AFP 연합뉴스
희대의 살해범 조승희가 미국 NBC방송에 보낸 우편물엔 기성 질서를 저주하는 병적 심리 상태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만 23세의 버지니아공대 영문학과 4학년인 그는 멀티미디어 세대답게 자신의 생각을 비디오, 사진, 음성 파일과 1800단어의 텍스트로 포장했다. 바깥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은 닫아걸고 폭력성 게임 등에서 영감을 얻은 듯했다.

▽신세대 문화의 영향=이날 공개된 비디오와 사진 속의 조승희는 검은 티셔츠에 주로 등산객이 입는 주머니가 많은 국방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의 불룩한 주머니엔 총알로 보이는 것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는 검은색 야구모자를 거꾸로 돌려 썼고, 손가락 끝이 드러나는 장갑을 낀 두 손에는 ‘세상을 향해 겨눈’ 쌍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가 비디오에서 “내가 그랬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 점은 일부 동영상의 최종 녹화시점이 1차 총격 이후라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그 쌍권총은 불과 1시간 전 학생 2명을 무참히 살해한 그 무기였다. 그는 NBC방송에 10분 분량의 DVD를 보냈지만, 그 안에는 27개의 퀵타임 동영상도 담겨 있었다.

쌍권총이 등장하는 홍콩 누아르 영화, 컴퓨터 게임 ‘툼 레이더’의 전사를 흉내 내려는 그의 복장과 몸짓은 범행 준비 과정에서 신세대를 지배하는 영상 문화의 깊은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동일시=그는 비디오에서 “에릭과 딜런 같은 순교자”라는 말을 썼다. 두 사람은 20일로 만 8년을 맞는 콜럼바인 총기 살해 사건의 두 범인(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이다. 자신이 다니던 고교에 난입해 학생과 교사 13명을 죽인 뒤 현장에서 이들은 자살했다. 그는 평소 존재감을 주지 못한 이들과 처했던 상황과 결말이 크게 다르지 않다.

소포의 발신으로 쓴 ‘A. Ishmael(이스마일)’은 숨진 그의 팔뚝에 씌어 있던 ‘이스마일의 도끼’를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 준다. 구약성경 속 아브라함이 첩으로 맞아들인 여성(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일은 이슬람교의 출발점으로 이해된다.

성서 속의 이스마일은 아브라함의 첫째 아내가 기독교의 시발점인 아들 이삭을 낳자 광야로 추방된다. 조승희는 세상과 담을 쌓은 자신을 ‘추방자’로 여겼을지 모를 일이다. 인터넷에선 사건 발생 직후 이스마일의 존재를 소설 모비딕(백경)에서 찾는 누리꾼도 있었다. 소설의 첫 문장에 등장하는 이스마일은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인관계에 실패했으며 뱃사람이 된다. 미국 이민→부모의 교육 강조→대학 진학→세상과 단절이라는 과정을 겪은 조승희와 오버랩되는 역정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사로잡힌 사회와의 격리감과 광기 어린 살의라는 ‘두 얼굴’은 스스로 찍은 사진에서도 확인된다. 총 43장의 사진 가운데 처음 2장에는 천진난만한 그의 표정도 담겨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반감과 저주에 찌든 ‘또 하나의 조승희’가 찡그리고 있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다중인격을 떠올렸을 법하다.

그는 자신을 십자가형을 앞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했다. 그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고 싶다”며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일깨우기 위해 예수처럼 죽는다”고 말했다. 자신을 강자에 억눌려 죽어 가는 약자로 대비했다.

18일에 이어 19일에 추가로 공개한 동영상에는 자신을 모세와 동일시하는 듯이 “모세처럼 바다를 가르고, 내 사람을 이끌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약자들, 무방비의 사람들, 모든 세대의 순진한 어린이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상이 싫다=참극 직후 경찰이 그의 기숙사에서 발견한 글에서 확인된 기성 사회, 부유층의 향락에 대한 반감은 그의 ‘선언문(매니페스토)’에서도 확인됐다.

벤츠와 금목걸이, 코냑과 보드카, 부모의 유산 펀드(trust fund)…. 그가 거론한 부자와 향락의 상징이다. 그는 기성 질서를 속물(snob)이라고 쏘아붙였다.

그의 주장과 글 어디에서도 ‘고유명사’가 드러나지 않는다. 불특정한 세상을 상대로 한 저주이기도 하지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에 대한 ‘논리’는 빠져 있다. 기숙사에서 발견된 글 “너 때문에 이 일을 저지른다(You caused me to do this)”에서 ‘너(You)’는 특정 개인이나 여학생이 아닌 ‘자신이 싫어하는 세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블랙스버그(미버지니아주)=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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