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만 언급해도 표 깎여”

  • 입력 2007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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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미국 보수파의 연례행사인 보수주의정치행동회의(CPAC) 콘퍼런스.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역사의 조류가 우리 편으로 흐르고 있다. 상대방(민주당)은 사상적으로 파탄 상태에 빠졌다”고 역설했다.

22년이 지난 지금,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이달 초 열린 CPAC 행사장에는 공화당 인사들의 우울함과 불안감 속에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짙게 깔렸다. 공화당의 유력 대선 예비후보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TV 토크쇼에 출연해야 한다는 이유로 아예 불참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판은 15일 ‘우파는 어떻게 잘못돼 왔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런 분위기를 전하면서 “공화당이 어느 때보다도 암울하고 불확실한 시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했다.

깊은 철학보다는 얄팍한 정치 캠페인이, 아이디어 넘치는 인물보다는 이해관계자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이 공화당의 현주소라는 것.

지난주 뉴욕타임스와 CBS방송이 공동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 10명 중 6명은 내년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공화당 의원들에 대해 ‘만족스럽지 않다’고 답변했다. 이는 민주당원의 60%가 ‘출마를 준비 중인 민주당 후보들에게 만족한다’고 답변한 것과 대조적이다.

또 공화당의 40%가 ‘내년 대선에서 패할 것’이라고 예상한 반면 민주당은 12%만이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한 공화당 정치 캠페인 컨설턴트는 “공화당(Republican)의 첫 글자인 ‘R’만 언급해도 점수가 깎이는 분위기”라며 “이런 상황이 선거 전에 바뀔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들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거리 두기를 하며 중산층 가족을 겨냥한 새로운 선거 전략에 고심하고 있다.

정치권과 2008년 대선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 우파의 위기는 밀턴 프리드먼으로 상징되는 경제자유주의, 기독교계 인사들의 사회적 영향력, 동성애자나 낙태 문제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파 지도자들이 과거와 달라진 경제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방향 설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한 가지 요인.

여기에 오랜 이라크전쟁에 대한 피로감, 보수적인 부시 정부의 독단적인 행정에 대한 비판도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입맛에 맞지 않는 검사들의 무더기 숙청 논란, 인권침해 요소와 편의적 시행으로 구설에 오른 ‘애국법(PATRIOT Act·테러 근절을 위한 법)’ 강행, 이라크전 부상 장병들의 치료를 소홀히 해 여론에 난타당한 월터 리드 육군병원 스캔들이 잇따라 터졌다. 딕 체니 부통령과 앨버토 곤잘러스 법무장관에 대한 사임 압력도 가중되고 있다.

특히 이라크전은 국제분쟁의 해결사였던 미국의 역할까지 흔들고 있다. ‘악의 축’을 몰아내기는커녕 북한과 이란 핵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이라크의 혼란도 가중됐기 때문이다.

이달 초 영국 ‘BBC 월드 서비스’가 27개국 2만8000명을 대상으로 주요 국가의 긍정적 부정적 영향력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미국이 전 세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대답은 51%로 절반을 넘어섰다. 이는 이스라엘(56%)과 이란(54%)에 이어 세 번째로, 4위인 북한(48%)보다도 높은 수치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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