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풍요로움 뒤엔 ‘자식’의 가난이 남았다

  • 입력 2007년 3월 1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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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호황과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유럽 베이비 부머들과 달리 그 자녀들은 취업난과 바닥난 연금 재정으로 불안한 장래를 걱정해야 하는 잃어버린 세대가 됐다. 지난해 3월, 취업 후 2년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도입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경제적 호황과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유럽 베이비 부머들과 달리 그 자녀들은 취업난과 바닥난 연금 재정으로 불안한 장래를 걱정해야 하는 잃어버린 세대가 됐다. 지난해 3월, 취업 후 2년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도입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4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독일 청년 다니엘 크나프 씨. 명문인 영국 런던 정경대(LSE) 석사학위 소지자이지만 6개월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런던 베를린 브뤼셀 등 유럽 어디서도 그의 능력에 걸맞은 일자리를 내 주는 곳이 없다.

독일에서는 크나프 씨와 같은 청년을 ‘인턴 세대’라고 부른다. 교육 수준이 높아도 정규직을 찾기 어려워 임시직원으로 불안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젊은 세대를 일컫는 조어다.

유럽의 다른 나라 젊은이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부르는 이름만 다를 뿐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들을 ‘불안한 세대’, 영국에서는 ‘IPOD 세대’라고 부른다. 애플사의 디지털 뮤직 플레이어 ‘아이팟’에 환호하는 세대라는 뜻도 있지만 ‘Insecure(불안하고)’ ‘Pressured(압박이 심하고)’ ‘Overtaxed(세금 부담이 크며)’ ‘Debt-Ridden(빚 때문에 고통받는)’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미국 주간지 뉴스위크 최근호(12일자)는 유럽에서 부모 세대인 베이비 부머들이 유럽식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누리면서 자식 세대에는 빙하기와 같은 암울한 고용 전망과 빚더미를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고 보도했다. 베이비 부머가 잃어버린 세대인 ‘베이비 루저(baby loser)’를 낳았다는 것이다.

▽풍요로운 부모세대, 가난한 자식세대=제2차 세계대전 후 태어난 유럽의 베이비 부머들은 사회주의 경제 정책의 축복을 듬뿍 받은 세대들이다. 한창 일할 나이에는 안정된 직장생활을 했고 은퇴한 뒤에는 두둑한 연금 덕분에 풍족한 노년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자식 세대의 불안한 미래는 부모 세대의 풍요로운 현재에서 잉태됐다. 부모 세대가 누리는 고용 안정은 자식 세대의 일자리를 앗아갔다. 부모들은 덜 내고 많이 받는 연금정책의 최대 수혜자이지만 자식들은 최대 피해자이다. 베이비 부머들의 출산율 감소도 젊은 세대의 세금 부담을 가중시켰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1975년 30세 프랑스인의 평균 수입은 50세보다 15% 적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격차가 40%로 크게 벌어졌다. 대학 졸업 후 2년이 지나도록 취업을 못한 비율도 1975년 6%에서 25%로 크게 늘었다. 최근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는 젊은이들이 부모 세대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답한 응답자가 5%에 불과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젊은 세대들은 독립할 수도 없다. 이탈리아에서는 30∼34세 젊은이의 45%, 프랑스에서는 24세 젊은이들의 65%가 부모 집에서 산다. 이는 1975년보다 두 배 늘어난 수치다. 경제 사정이 상대적으로 나은 영국도 내 집 마련의 시기가 1976년 26세에서 최근에는 34세로 늦어졌다.

▽계층, 인종 갈등보다 무서운 세대 갈등=풍요로운 부모 세대와 가난한 자식 세대는 세대 갈등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생활고를 겪는 젊은 세대가 연금 혜택을 누리는 부모 세대를 비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베이비 부머 작가는 최근 ‘불안한 세대’를 다룬 저서에서 “자녀들이 우리를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프랑스 대학생과 청년들의 단체인 ‘콩코르드의 힘(Impulsion Concorde)’의 클레망 피통(23) 회장은 “우리는 당신들(부모)의 빚을 갚지 않겠다”는 청원서를 돌리기도 했다.

영국에서도 최근 시장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해 경제 호황을 누렸던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에 태어나 1997년 노동당 집권 후 미래가 불안해진 세대들을 다룬 ‘메기의 자녀들’이라는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영국 보수당의 교육 공보관 데이비드 윌레츠 씨는 “젊은이들이 중년 세대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음모를 꾸몄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총리는 최근 연금 개혁을 언급하며 “이탈리아는 모든 세대가 불확실한 삶을 살지 않도록 노력할 도덕적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연금 개혁은 대부분 유럽 국가들의 최대 현안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적다. 정책 결정자들 가운데 베이비 부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 장관들의 평균연령은 1997년 노동당이 집권한 뒤 두 살이 높아져 50세가 넘는다.

프랑스 작가이자 전직 정치 고문인 베르나르 스피츠 씨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의 세대 간 갈등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군과 독일의 갈등에 비유했다.

“우리가 젊은 세대가 부담할 거라면서 빚에 의존하는 삶을 지속하는 것은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이 배상금을 지불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919년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인 독일에 과도한 전쟁 배상금을 부과했고 세월이 흐른 뒤 이것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는 지적이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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