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만 한인 편지호소 의원들의 마음 움직여”

  • 입력 2007년 2월 10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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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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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미국 워싱턴의 의사당 본관 남쪽에 있는 연방 하원의원들 사무실의 팩스가 몸살을 앓았다. 뉴욕 뉴저지 캘리포니아 등 한인 유권자가 많은 의원과 국제관계위원회 사무실 등에 유권자들의 팩스 편지가 쇄도한 것이다. 많을 때는 하루 200통이 넘었다고 한 관계자는 귀띔했다. 이 편지들은 일제의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 규탄 결의안에 의원들의 관심과 지지를 호소하는 한인 유권자들이 보낸 것이었다.

일제의 일본군위안부 만행에 대한 일본 총리의 분명한 사과와 역사교과서 왜곡을 중단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결의안 채택이 미 하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15일엔 사상 첫 의회 청문회가 열려 한국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명과 네덜란드인 피해자 1명이 증언한다.

상황이 여기까지 진전된 데는 지난해 일본군위안부 결의안 상정을 주도한 레인 에번스 의원, 그리고 그가 은퇴하자 그 바통을 이어받은 마이클 혼다 의원 등의 노력이 컸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다. 물밑에선 수십만 재미 한인 유권자의 정성 어린 풀뿌리 운동이 큰 힘을 보탰다. 많은 한인이 한인유권자센터가 벌이는 편지 보내기 운동 사이트에서 편지 양식을 내려받거나 정성스레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 같은 풀뿌리 운동은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소장 김동석·사진), 워싱턴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대표 서옥자)를 비롯한 미국 내 한인단체 봉사자들이 불을 지폈다.

“지난해 봄 에번스 의원이 일본군위안부 결의안을 내려 하는데 다른 의원들의 지지 서명을 구한다는 얘기를 우연히 전해 들었어요. 한인이 많이 사는 지역의 의원 사무실을 찾아가 얘기를 꺼냈지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만행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의원들이 설명을 듣더니 관심을 보이더군요.”

김동석 소장은 8일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풀뿌리 운동의 전개 과정을 설명했다. 자원봉사자 4명과 함께 500통가량의 카드와 편지를 써서 하원의원들에게 보냈다. 이 일을 4번이나 거듭했다. 웹 사이트에서 회원들에게 참여를 촉구하고 각종 행사를 벌이고, 다른 아시아 민족 유권자단체들에도 지지를 호소했다.

이어 의원 사무실들을 찾아다니며 협력을 당부했다. 45명에 이르는 뉴욕 뉴저지 지역 하원의원 중 40명가량이 지지를 약속했다.

“초당적 이슈인 데다 미국 의회가 추구하는 인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대부분 흔쾌히 오케이(OK)를 해 주더군요. 연방의원은 워싱턴에선 대단한 자리지만 유권자로서 접근하면 누구보다도 가깝고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들입니다. 한인 유권자가 힘을 합치면 당선시킬 힘은 없을지 몰라도 떨어뜨릴 수는 있거든요.”

뉴욕 시내 한인 밀집 지역의 한인 마트에선 지지 서명 운동을 벌여 1만4000명의 서명을 모아 줬다. 일본 기업이 많은 지역인 S 의원의 지역구 한인들은 2만 달러나 되는 후원금을 모았다.

“비자면제 협정 문제엔 적극 도와주겠다고 하더니 일본군위안부 문제엔 내키지 않아 하는 의원도 꽤 있었어요. 일본 쪽에서 ‘그 문제엔 무관심한 채로 지내 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들어왔다고 몇몇 보좌관이 전하더군요.”

그러나 에번스 의원의 결의안은 본회의 통과라는 최종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일본 측은 지난해 중반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지낸 거물급 전직 의원 밥 마이클 씨를 월 6만 달러의 보수를 주고 과거사 문제 전담 로비스트로 고용했다. 당시 하원의장은 마이클 씨와 교분이 깊은 관계로서 퇴임 후 주일대사 자리를 희망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9월 13일 국제관계위를 만장일치로 통과한 결의안은 결국 본회의 상정이 무산된 채 연말에 자동 폐기됐다. 그러나 올해 초 불씨가 다시 살아났다.

“1월 3일인가, 혼다 의원이 결의안 제출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평소 친분이 있던 공화당 의원에게 부탁했더니 흔쾌히 결의안 공동 발의에 동의해 줬어요.”

이번에도 일본 측은 대형 로펌인 S사와 로비 계약을 하고 5월엔 자민당 의원들이 미국을 방문할 계획을 추진하는 등 저지에 적극 나서고 있다.

김 소장은 “일본의 전략은 이 문제를 한일 간의 대결로 몰고 가는 것”이라며 “만에 하나라도 워싱턴에서 한국 정부나 정치권이 일본과 싸우는 모습을 연출하면 결의안의 본회의 상정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내달말까진 본회의 상정될 것”결의안 제출한 혼다 美의원

“다수 의원이 초당적으로 일본군위안부 결의안 채택에 동참해 줄 것을 확신합니다. 결의안이 3월 말까지는 상임위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저의 희망 섞인 관측입니다.”

군위안부 결의안을 지난달 31일 미국 하원에 제출한 마이클 혼다(민주·캘리포니아 주·사진) 의원이 8일 언론사 합동 전화회견을 했다.

일본계 의원인 그는 “톰 랜토스 외교위원장이 상임위 상정을 받아 줄 것으로 예상한다”며 “(본회의 상정권을 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도 개인적으로 이 결의안을 지지할 뿐 아니라 과거 제출됐던 결의안에 공동서명한 일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결의안 채택이 미일 관계를 해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정의(正義) 없이 어떻게 진정한 관계가 가능하겠느냐. 손에 상처가 있는데 피부를 계속 벗겨내면 절대 낫지 않는다. 상처가 아물고 새로 생겨난 피부 조직은 주변 피부보다 더 강하다”며 “사과하는 데 너무 늦었다는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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