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하종대]중국의 ‘굴기’

  • 입력 2006년 12월 14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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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의 굴기(굴起·우뚝 일어섬).’

중국 관영 중앙텔레비전(CC TV)이 지난달 13일부터 24일까지 방영한 12회분 다큐멘터리 제목이자 요즘 중국인 사이에 가장 많이 오르는 화두(話頭)다.

다큐멘터리는 ‘지리상의 발견’ 이후 500년간 세계무대를 주름잡았던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미국 등 9개 대국의 흥망사를 다루고 있다.

CC TV는 시청자의 반응이 뜨겁게 나타나자 프로그램 전회를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9일까지 다시 내보냈다. 6장짜리 DVD도 불티나게 팔린다.

내용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중국인에게는 충격적이다. 그동안 비판의 대상이던 제국주의의 침략행위는 ‘대국의 굴기’를 위한 과정으로 묘사된다. 패권(覇權) 역시 배척 대상이 아니라 향수해야 할 전리품이 된다.

그럼에도 충격을 받은 중국인은 별로 없는 듯하다. 오히려 ‘드디어 대국이 되는구나’ 하는 기대와 자부심으로 들떠 있는 표정이다.

그러나 구미에서는 중국이 패권국가의 길로 가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어느 때보다도 크다.

최근 중국의 지표를 보면 기우가 아니다. 중국은 이미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다. 구매력을 감안한 국내총생산(GDP)은 8조8830억 달러로 미국의 12조3100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지난해 중국의 세계경제 성장기여도는 13%에 이른다. 2042년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최근 독일 마셜펀드의 조사에 따르면 유럽인과 미국인 59%는 중국의 초고속 성장을 ‘위협’으로 느낀다.

중국 지도부 내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적잖게 나오고 있다. 여전히 ‘도광양회(韜光養晦)’해야 할 시점에 너무 이르게 ‘중국의 굴기’를 표출했다는 것이다. 도광양회란 덩샤오핑(鄧小平)이 제시한 외교노선으로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정점으로 한 중국의 제4세대 지도부는 2002년 출범 이후 ‘평화롭게 우뚝 일어선다’는 ‘화평굴기(和平굴起)’로 이를 대체했다.

중국 지도부는 공연한 분란을 우려해 이 프로그램을 더는 방영하지 않을 방침이다.

그러나 중국을 바라보는 외부의 우려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중국도 강성한 패권국가가 돼야 한다는 야심이 프로그램에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시기상조론’은 야심을 너무 일찍 내보였다는 것으로 야심을 버리자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과 백두산공정으로 한국과 마찰이 일자 내부를 단속하면서 시기상조를 거론했다. 이들 공정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주변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시기에 분란을 일으켰다는 질책이었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2004년 3월 15일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 2차 회의가 끝난 뒤 700여 명의 내외신 기자 앞에서 “중국은 앞으로도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국의 굴기’는 마지막 회에서 “영원한 평화와 공동번영의 조화사회를 이룩하는 것은 인류가 공동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끝을 맺었다.

중국과 지근거리에 위치한 한국은 중국이 힘차게 일어설 때마다 피해를 본 역사적 경험이 있다. 중국이 자랑하는 한(漢)무제 시절엔 고조선이 망했고, 당(唐) 시절엔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만주무대를 잃었다.

원 총리의 다짐이 헛말이 아니길 바란다. 베이징(北京)에 주재하는 외국 특파원으로서 중국이 진실로 공동번영의 조화세계를 이룩해 박수를 받길 바란다. 그렇게 되리라 굳게 믿고 싶다.

하종대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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