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신흥 억만장자들의 생존법

'권력과 눈을 마주치기 전에 엎드리거나 숨어 버린다.'

요즘 러시아 신흥 억만장자들의 생존 방식을 요약하면 이렇다.

지난주 말 모스크바 시내 신문 판매대에서는 유리 루쉬코프 모스크바 시장의 부인 옐레나 바투리나(43) 씨의 이야기를 실은 포브스 러시아판 11월호 12만부가 회수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잡지 커버스토리는 내년 말 끝나는 루쉬코프 시장의 임기가 그의 부인 사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하는 기사였다. 하지만 바투리나 씨 측이 "기사 중 '다른 투자자처럼 나의 권리가 보호될 것'이라는 인용문이 잘못됐다'며 강력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잡지가 판매대에서 사라진 것.

건설회사 '인데코' 회장인 그녀는 재산 23억 달러(약 2조1850억 원)로 러시아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포브스 명단에 올랐다. 그녀 주변에는 '남편의 부동산 붐 정책 덕분에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막심 카출로프스키 포브스 러시아판 편집장은 "기사 전체를 아예 싣지 말라는 것이 그녀의 요구"라고 설명했다.

최근 러시아 갑부 주변의 스캔들로 볼 때 그녀의 항의가 '과민한 대응'만은 아니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포브스 커버스토리는 공교롭게도 러시아 억만장자 랭킹 8위인 술레이만 케리모프(40) 국가두마 의원의 교통사고 직후 나왔다. 주식투자로 거액을 벌어 '러시아의 워런 버핏'이라는 말을 듣는 그는 지난달 25일 파리에서 자동차를 몰다 가로수를 들이받아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그가 몰고 다닌 차가 고급 외제차인 페라리인데다 러시아 유명 여자 탤런트 티나 칸델라키(31)와 동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크렘린 핵심층이 '억만장자 몇몇을 손볼 것'이라는 말이 퍼졌다.

러시아 4위 갑부 빅토르 벡셀베르크 TNK-BP 대주주도 최근 '이 회사 지분이 국영기업에 넘어갈 것'이라는 관제 언론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유코스 사태의 학습 효과로 억만장자들의 크렘린 공포증은 더 심해질 수 있다고 러시아 경제지들이 전했다. 2004년 러시아 최고 갑부였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43) 전 유코스 회장은 크렘린에 미운 털이 박혔다가 투옥과 회사 파산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러시아 신흥 갑부 대부분은 1992년 사유화 조치 이후 권력과의 유착 또는 내부자 거래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과거 재산의 정당성이 부족할수록 지금의 권력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

일찍이 권력 앞에 엎드리거나 재산 일부를 기부하는 처세술이 더 현명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러시아 최고 부자이자 영국 프로축구팀 '첼시'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40) 씨는 극동의 추코트카 주지사로 나가 이 지역에서 재산을 헌납할 기회를 찾고 있다. 그는 러시아 모델 다리아 조코바(23)와 휴가를 즐긴 사실이 들통 났지만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러시아 6위 갑부 올레그 데리파스카 씨는 2014년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최근 한국의 평창과 경쟁하는 소치 시의 공항을 통째로 사들여 크렘린의 환심을 샀다.

정위용 모스크바특파원 viyon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