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권순택]美자유의 여신상에 새겨진 詩

  • 입력 2006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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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건축업을 하는 교포 J(61) 씨는 불법 체류자 출신이다.

그는 광복 후 북한에서 지주라는 이유로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1946년 빈손으로 월남한 집안의 장남이다. 가난 때문에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뒤로 공사판을 전전해야 했다.

1978년 쿠웨이트를 거쳐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일했던 그는 1983년 관광비자로 미국에 건너왔다. 비자 기간이 끝나면서 그는 별 수 없이 불법 체류자가 됐다. 야간에 건물 청소로 돈을 벌었다. 불안하고 고단한 생활이었다. 서울에 남은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어렵게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1987년 미국 정부의 불법 체류자 사면령 덕에 영주권을 받게 됐다.

J 씨는 그 후 가족을 모두 미국으로 불렀고 사업도 번창해 지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불법 체류자 출신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지금 미국은 J 씨처럼 돈을 벌기 위해 몰려든 불법 체류자 문제로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시끄럽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불법 체류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민법 개정을 제안한 뒤 의회에서 이민 법안이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 정당과 정치인들은 11월 중간선거와 2008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물론 9·11테러 이후 외국인에 대한 불안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불법 체류자는 1100만∼1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게다가 매년 300만 명, 하루 평균 8200여 명꼴로 늘고 있다 하니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멕시코 출신이 절반을 넘지만 한국인 불법 체류자도 20만∼30만 명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미국인들이 불법 체류자와 함께 지내 온 것은 오래된 일이다. 그들과 함께 일하고, 쇼핑하고, 학교에 다니고,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가정부나 잔디를 깎는 사람, 직장의 청소원도 대부분 불법 체류자이다. 집을 고치거나 이사할 때 싼 맛에 자주 부르는 인부 가운데도 불법 체류자가 많다.

불법 체류자를 모두 추방하려면 20만 대의 버스가 동원돼야 한다. 단속에 필요한 경찰관도 수십만 명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불법 체류자를 모두 추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온다.

경제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불법 체류자들은 미국 경제에 긍정적 기여와 함께 부정적 영향도 미치는 게 사실이다.

캘리포니아 주가 불법 체류자 때문에 쓰는 돈이 연간 10억 달러나 되며, 뉴저지 주 병원에서는 불법 체류자에게 들어가는 돈이 연간 1억 달러라는 주장도 있다.

출산율 하락과 고령화 현상으로 젊은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이른바 3D 직종에 필요한 노동력의 부족은 불법 체류자의 수요를 더욱 증가시킬 것으로 보인다. 조선족과 동남아 출신 불법 체류자가 적지 않은 한국도 정도의 차는 있지만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 문제 해결을 위해 제시된 방안은 다양하다. 전원 추방 및 처벌 같은 강경론부터 사면을 통한 영주권 부여나 임시 노동 허가 같은 온건론까지 나와 있다.

국경 경비를 강화해 안보를 튼튼히 하면서도 법의 지배 원칙과 희망의 상징으로서의 미국의 이미지를 지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 최선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이룩한 나라다. 관문격인 뉴욕 항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 주춧돌 동판에 새겨진 미국 시인 에마 라자루스의 시에 담긴 정신을 기억할 일이다.

‘고단하고 가난한 자들이여, 자유로이 숨쉬고자 하는 군중이여, 내게로 오라.’

권순택 워싱턴 특파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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