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죽인 軍을 딸이 품었다

  • 입력 2006년 1월 17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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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경제의 우등생으로 꼽히는 칠레에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15일 치러진 칠레 대선 결선투표에서 집권 중도좌파연합의 미첼레 바첼레트(54) 후보가 53.49%의 득표율을 올려 야당인 중도우파연합 소속 세바스티안 피녜라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을 최종 확정지었다. 피녜라 후보의 득표율은 46.5%.

이로써 중도좌파연합은 1990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의 군정 종식 이후 다섯 번째 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군과 민간의 다리 역할로 명성=남미에서 여성 대통령의 집권은 1990년 니카라과의 비올레타 차모로, 1999년 파나마의 미레야 모스코소 대통령 이후 세 번째. 그러나 정치인 남편의 후광을 입지 않은 경우는 바첼레트 당선자가 처음이다.

바첼레트 당선자의 이력은 피노체트 전 대통령의 억압통치 시대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1973년 아옌데 정권이 쿠데타로 전복될 당시 그의 부친인 알베르토 바첼레트 장군은 아옌데 대통령의 자문역을 수행하다 체포돼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바첼레트 당선자 역시 어머니와 함께 연행돼 고문을 당한 뒤 강제 추방돼 호주와 동독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979년 가까스로 귀국해 의대를 졸업한 뒤에는 소아과병원을 개업하고 실종 정치범 유자녀를 돌보는 비정부기구 ‘피데(PIDEE)’ 의장으로 활동했다.

1990년 칠레 민주화 이후 그는 보건부 자문역을 지내며 ‘군과 민간인의 다리 역할’을 소중히 여겼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자 군사학 연구에 몰두했다. 국립전략연구소에서 연구를 마친 뒤 미국 워싱턴 국방대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여성 국방전문가로 명성을 떨치며 보건장관, 국방장관 직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중도좌파연합의 실력자로 발돋움했다.

그는 “나는 칠레 보수 사회가 증오하는 모든 ‘죄악’을 대표한다. 사회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의 딸이며 이혼했고 종교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해 왔다. 그런 그가 집권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데는 ‘여성이지만 군심(軍心)을 꿰뚫고 있다’는 점도 큰 몫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성장과 복지 증진 지속”=바첼레트 당선자는 15일 당선 기념 연설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계속 갈 것이다”고 말해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의 정책 노선을 승계할 뜻임을 밝혔다. 라고스 대통령은 취임 이후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등 과감한 개방정책을 통해 매년 6%대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뤄 왔다.

그러나 바첼레트 당선자는 ‘좌파’ 소속 당선자답게 복지 및 분배의 강조를 잊지 않았다. 그는 “2010년까지 칠레인들이 버젓한 직장과 확고한 사회보장제도를 향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여자끼리 대륙회의 해도 되겠네”

미첼레 바첼레트 후보가 15일 칠레 대통령 당선을 확정지음에 따라 지난해 말부터 불고 있는 세계 정치계의 여풍(女風)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아프리카 유럽 남아메리카 등 3개 대륙에서 여성 대통령이 잇따라 권좌에 등극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기 때문.

북유럽 핀란드의 타르야 할로넨(62) 대통령은 칠레 대선과 같은 날인 15일 치러진 대선에서 46.4%의 득표율을 올려 24%를 차지한 2위 울리 니니스토 전 재무장관을 거의 더블 스코어로 압도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에 실패해 29일 결선투표를 치르지만 선거전문가들은 그의 재집권이 확실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는 지난해 11월 8일 실시된 대선에서 여성인 엘렌 존슨 설리프(67) 후보가 집권에 성공해 16일 취임식을 했다. 필리핀의 글로리아 마카파칼 아로요 대통령도 2010년까지 임기를 채울 전망이다. 내각책임제인 뉴질랜드의 헬렌 클라크(오세아니아) 총리를 합치면 여성이 국정을 책임진 나라는 북미를 제외한 5개 대륙에 펼쳐지게 된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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