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시대<동아일보>와<조선일보>

  • 입력 2004년 5월 19일 15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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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저명한 언론인과 언론학자들의 논문을 엮어 만든 「日本의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일본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책에는 아사히 신문 한국 특파원을 지낸 오다가와 고오씨의 ‘식민지 조선의 미디어에 나타난 일본 및 일본인'이란 제목의 논문도 함께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오다가와 전 한국 특파원은 이 논문에서 일제시대 <동아>와 <조선>의 역할, 두 신문에 실린 일본과 일본인의 언동(言動)등을 분석하고 두 신문 창간의 의의, 조선총독부와의 투쟁, 창간과 폐간 과정 등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압정에 항거한 3.1독립운동을 계기로 일본은 통제 수단을 ‘문화정치’로 전환하고 사이토총독의 유화정책 아래 <동아> <조선> 등 민족지 발행을 허가했다”면서 “<동아>는 1920년 4월1일 창간사에서 ‘본사의 앞길은 몹시 위험하다’고 밝혀 이미 당국의 탄압을 예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두 신문은 식민지에서 압박받는 조선 민중의 실정을 지면을 통해 호소하면서 정간, 압수, 배포금지 등의 압박을 받아오다, 1940년 ‘국책순응’이라는 명목으로 함께 폐간됐다”면서 “<동아>의 경우 1936년 베를린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발행정지처분을 받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논문 작성과 관련, "식민지 시대 한국의 언론을 일본독자들에게 소개하는데 큰 의미가 있다"면서 "한일양국의 언론사에 작은 기념비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창현 동아닷컴기자 cch@donga.com

다음은 오다가와 고오씨의 논문 요약

○1919년 3월, 일본의 압정에 항거한 조선민중의 3·1독립운동에 의해 일본은 통제의 수단을 느슨하게 해 <문화정치>로 전환하고 사이토총독의 유화정책 아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민족지 발행을 허가하였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의 창간호에서 ▽조선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 ▽민주주의를 지지함 ▽문화주의를 제창함 - 이라는 3대강령을 내세우며 발족했으나 창간사는 <본사의 앞길은 몹시 위험하다>고 이미 당국의 탄압을 예기하고 있었다. 실제 이 신문은 창간후 합계 3회, 280여일간에 걸친 정간처분 외 압수, 배포금지 등의 압박을 수없이 받았다.

이 신문이 <정책의 강행>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가 압수된 1925년 9월 21일자 사설은 <현재 조선에서 실행되고 있는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 자신들의 입장과 이해(利害)에만 취해 권력을 남용하고 호도(糊塗)와 고압(高壓) 오직 그 길로 가고 있다>고 문화정치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러한 정책의 구체적인 예로써 이 신문은 다음과 같이 썼다(1926년 2월 22일자 사설=압수).

조선의 철도와 전신전화 도로 그리고 그 외 문명의 이기(利器)는 현재 조선인의 생산력에 비해 과도하게 발달했다. 그것이 조선인의 생활상 필요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의 생활상 필요에 따른 것으로, 되레 조선인에게 부담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 경성과 그 밖의 도시의 화려함 (...) 경찰청사의 과분하게 높은 가격의 건물 (...) 은 조선인이 토지를 잃게 되는 간접적이고도 중대한 원인이 됐다.

<일시동인(一視同人)>의 실체는 통치강화가 주된 목적이며 식민지화에 의해 조선민중의 생활이 저락(低落)을 면치못한 일이 이와같은 사설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민족지는 식민지 경제 아래 대중의 생활이 압박받는 실정을 호소했다. 동아일보는 <조선민중의 부담을 경감하라>는 사설(1931년 3월 6일자)에서 <세계공황의 일부분으로서 조선의 경제공황은 조선민중의 대부분에 의해 극도의 가혹한 농촌공황을 초래했고 전민족적인 위기를 양성하게 되었다. (...)민중의 소리는 부담의 경감을 일제히 절규하는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 유일한 길은 직접 및 간접의 공과금을 면제하거나 또는 경감하는 일이다> 라고 하는 등 조세와 노동력 부담의 과중함을 시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 신문은 1939년 년말 평양의 토막민(土幕民 - 토굴생활자) 르포를 보도했다. 농촌의 궁핍함을 못견뎌 고향을 떠난 하층의 소작농들이 도시에 흘러들어 극빈생활을 하는 모습이다.

< 다리 기슭에 굴을 파고 짚과 판자때기만으로 지은 황폐한 집을 수없이 볼 수 있다. 북극도 아닌데 방안에서 얼어죽는 불행과 원통함이 이 마을에서는 그치지 않는다. 추위가 닥쳐 일할 수 없게 되면 부녀자와 노파들은 돈많은 집에 동냥하러 다닌다>(동년 12월14일자).

○ 이러한 민족지는 일중전쟁(1939년) 이후 그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 비판적 논조에서 비켜갔으나 <국어상용론>을 강요하는 등 언론통제가 더욱 엄해진 가운데 결국 1940년8월10일 <국책 순응>이라는 명목으로 두 신문 함께 폐간되고 말았다.

동아일보의 경우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해 시상대에 선 손기정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말소해 8월25일 석간지면에 실은 까닭에 당국으로부터 발행정지처분을 받았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태는 다시 한번 민족감정을 고무시켰다.①

전후(戰後) 일한관계에 투영

○ 일본이 식민지조선에서 행한 미디어정책은 전후 일한관계에 후유증을 남겼다.

○ 식민지시대 미디어에서 보여졌던 일본과 조선반도의 수직적인 관계는 전후 미소(美蘇) 냉전기의 <반공>정책아래서 국력이 앞선 일본의 친한파가 한국의 친일파를 돕고 계몽한다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이 정치 경제 양면에 걸쳐 일한유착을 낳고 양국간의 <역사문제>를 덮고 은폐해 국민 레벨의 화해를 저해해 왔다.

○ 한편으로는 일본과 한국의 수평적인 관계가 싹텄다.

이미 1970년대 중반, 박정희 독재정권의 탄압에 저항한 동아일보의 언론투쟁(1974~75년)에 적지않은 일본시민이 자주(自主)광고를 이 신문에 실었다.

○ 2002년 월드컵 축구는 일한 미디어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것은 민주주주의 체제하에서 미디어가 민족간의 화해를 촉구하는 힘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②

① 동아일보 폐간의 사정에 대해 한국4.7언론인회편 <한국신문종합사설선집 - 일제편>(1947년)은 <(당국이) 경리부정사건과 독립운동자금 출연이라는 날조극을 만들어 중역과 간부들을 대거 구속하는 등 광적인 악행을 행했다>고 하고 있다.

② 예를 들어 아사히신문과 동아일보는 약 한달간의 월드컵 대회기간을 통해 일한 신문사상 처음으로 양지(兩紙)의 기자칼럼을 교환, 원문(번역은 옆에 딸림)으로 게재했다. 이와함께 식민지 지배를 테마로 한 재일작가 유미리의 소설 <8월의 끝>을 동시연재한 것도 첫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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