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기념일 일본의 두 얼굴

  • 입력 2003년 8월 15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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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료 4명-이시하라 神社참배 ▼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15일. 도쿄(東京)에는 하루 종일 폭우가 쏟아져 홍수경보가 발령됐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이 묻힌 야스쿠니(靖國)신사에는 참배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인근 지하철역에서 신사 정문에 이르는 200여m의 광장과 도로는 우익단체들이 내붙인 격문과 구호로 뒤덮였다. 옛 군가가 귓전을 때렸고 옛 일본군 복장을 한 우익단체 회원들은 일장기와 옛 일본군기를 흔들었다.

“일본을 지키려다 목숨을 바친 250만 영령을 추모하는 오늘,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은 고이즈미 준이치(小泉純一郞)로 총리는 각성해야 한다.”

“왜 일본이 한국 중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가. 한국과 중국은 일본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

20대 중반의 우익단체 회원이 확성기를 들고 외치자 박수가 나왔다.

‘신주성의단(信州誠義團)’이라는 단체는 “대일본제국이 미국과 싸운 것은 백인들의 노예로 전락한 아시아인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신사 입구에서는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히로히토(裕仁) 천황을 기념해 ‘쇼와(昭和) 신궁’ 건립을 추진하는 단체가 참배객을 상대로 서명 및 모금운동을 벌였다.

이날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 경제산업상 등 현직 각료 4명이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했고 일부 각료는 15일 이전에 참배를 마쳤다.

일본의 대표적 우익정치인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는 4년 연속 신사에 참배해 박수를 받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의원모임’ 소속 국회의원 55명도 단체로 참배했다.

전쟁이 끝난 지 58년이 흘렀지만 8월 15일 야스쿠니신사를 찾는 참배객 수는 계속 늘고 있고, 극우단체는 아예 전쟁의 정당성까지 주장하고 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평화유족회 "日 범죄 잊지말라" ▼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에 가지 말라.”

“평화헌법을 개악하지 말라.”

“자위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한다.”

150여명의 ‘평화유족회 전국 연락회’ 회원들은 15일 낮 도쿄(東京) 도심에서 빗속 가두시위를 벌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가족을 잃었거나 전쟁에 참가했던 이들이었다.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당시 총리가 야스쿠니(靖國)신사를 공식참배한 뒤 생긴 단체다.

중국에 징병됐던 회장 오가와 다케미쓰(小川武滿·90)는 집회에서 “나이가 들어 집회 참석도 올해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면서 “그러나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일은 겨우 시작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군수공장 강제노동에 동원됐던 시미즈 마사나리(淸水正也·72)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는 나쁜 일이지만 일제 때 수백만명을 징병 징용한 일본의 납치범죄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시위대의 가두행진 도중 어디선가 “신사참배 반대라고? 너희 놈들은 대체 누구냐”는 확성기 소리가 들리더니 건장한 20대 청년 10여명이 달려들었다. 일본국신당(日本國神黨)이라고 쓰인 차량에 타고 있던 청년들이었다. 경찰의 제지로 충돌은 없었지만 대부분 노인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극우단체 청년들의 협박에 움찔했고 일부는 시위대열에서 떨어져 나갔다.

다리를 절며 시위에 참가한 79세의 한 노인은 “폭력단 소속 야쿠자들인데 못된 정치인들이 정치자금을 받고 이들을 비호하고 있다”며 “일본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고 한숨지었다.

시위대는 결국 우익단체 회원들이 진을 친 야스쿠니신사 근처에는 접근할 엄두도 못 내고 30여분 만에 해산했다.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日 신문 사설도 두 얼굴 ▼

일본 신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기념일’인 15일 일제히 관련 사설을 게재했지만 사설의 논조는 매체에 따라 확연하게 갈렸다.

마이니치신문은 “해마다 오늘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두 번 다시 어리석은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요즘은 상황에 따라 전쟁도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며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결정 등을 우려했다.

아사히신문은 “아시아 국가와의 사이에는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한 역사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며 이제는 상대와 진정한 화해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아사히는 이어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언급하면서 “일본은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 하면 얼마나 큰 참화를 겪게 되는지 북한에 알려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반면 요미우리신문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A급 전범은 일본 국내법으로는 ‘공무로 사망한 사람’”이라며 일본 국민은 인근 국가의 편협한 애국주의와 반일(反日) 내셔널리즘에 맞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사병은 우수했으나 지휘관이 무능해 전쟁에 패한 것”이라며 “극심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휘관이 명확히 방향을 제시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패전의 교훈”이라고 다소 색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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