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총격가담 美병사 증언]"부대장 전원사살명령"

  • 입력 1999년 10월 7일 18시 41분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양민 학살의혹사건이 49년만에 역사적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당시 총격에 가담했던 미군 병사들의 용기있는 육성증언 덕분이었다. 학살의혹을 전한 AP통신은 참전군인 6명의 증언으로 진상이 밝혀질 수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상병으로 참전한 에드워드 데일리(68·테네시주 클라크스빌 거주)는 그 6명 중 한 사람. 그는 6일(미국시간) 동아일보와의 단독 전화인터뷰에 응해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심경을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미군기 철로위에 난사

―당신도 양민을 사살한 병사 가운데 한명인가.

“그렇다. 나는 기관총사수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먼저 노근리 굴다리 밑 사건 이전에 일어난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50년 7월25일 미군기들은 철로 위에 있던 피란민들을 향해 무차별 기총소사했다. 당시 북한군의 T34 탱크가 철도 터널에 숨어 우리에게 포격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탱크와 교전중에 그런 불상사가 생긴 것으로 보였다. 다음날에도 미군기들은 철로 위를 무차별 난사했고 피란민들은 노근리 마을에 숨었다가 마을 주민과 뒤섞여 마을 밖으로 빠져나와 노근리 굴다리 밑으로 몰려들었다.”

―미군이 다리 밑으로 몰아넣은 것 아닌가.

“그렇지는 않다. 이 대목에 관한 피해자 증언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작전을 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미군기들이 마을을 폭격할 것을 우려했고 기총소사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다리 밑으로 모여든 게 아닌가 싶다.”

▼대부분 부녀자-어린이

―다리 밑에 모인 양민수는….

“다리 밑 공간은 길이 27m, 너비 8m, 높이 17m 정도로 꽤 넓어보였다. 150∼200명쯤이었다. 대부분이 부녀자 노인 어린이들이었다.”

―어떻게 사격하게 됐는가.

“먼저 4정 이상의 기관총을 다리 양쪽에 설치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굴다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얼마 뒤 굴다리에서 우리를 향해 서너차례 라이플 총탄이 날아왔다. 그러자 우리 중대 통신병이 부대장 히처 소령의 지시라면서 전원 사살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우리는 북한군이 피란민으로 위장해 우리를 후방에서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줄곧 갖고 있었다. 먼저 다리의 다른 쪽에서 사격이 시작됐고 나도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이리저리 튀고 굴다리 밑은 끔찍한 지옥으로 변했다.”

―살해된 사람 중에서 북한군을 발견했는가.

“나는 현장까지 가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이 흰 한복차림의 양민 속에서 북한군복을 입은 서너명의 병사를 발견했다고 했다.”

―아녀자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군인이었다. 군의 명령은 생명과 같다.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잘못 사격한 것을 안 뒤에 동료들과 얘기를 나눴는가.

“안했다. 노근리만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유사한 사건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낙동강 너머에서 진지전에 들어갈 때까지 후퇴하는 동안 피아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고한 인명피해가 많았다.”

▼ 사는게 너무 힘들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는….

“86년 전우들과 만났을 때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남기겠다고 하자 전우들이 쓰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지금까지 줄곧 이 사건이 밝혀지기를 희구해왔다.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 말하는 것이 기쁘다.”

―한국에 가본 적은 있는가.

“93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방문했다. 그때는 이 사건이 밝혀지기 전이었다.”

―전쟁후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대학을 졸업한 뒤 철강회사에 들어가 경영간부까지 지내다 은퇴했다.”

▼한-미 정부조사 응할것

―앞으로 한국과 미국 정부의 조사에 응할 것인가.

“물론이다.”

그는 이날 미국 ABC방송과도 장시간 인터뷰했다. 동아일보와의 전화인터뷰는 밤12시까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으나 그의 음성에는 피로의 기색이 없었다. 오랜 굴레를 벗은 탓일까.

그러나 당시 참전군인들이 모두 데일리와 같은 것은 아니다. AP통신의 인터뷰에는 응했던 노먼 팅클러, 진 헤슬먼 등은 인터뷰를 거절하고 또다시 긴 침묵에 들어갔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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