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부상자들 『TV폭력장면만 봐도 공포에 시달려』

  • 입력 1999년 10월 6일 19시 48분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당시 간신히 살아 남았으나 미군의 총격으로 다친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과 장애 때문에 평생 동안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총격으로 코와 오른쪽 광대뼈가 없어지고 어머니를 잃은 정구학(鄭求學·56·충북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씨.

정씨는 이 충격으로 초등학교 때 습득한 한글을 모두 잊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14세 때 가슴살을 떼내 성형을 했지만 완전치 않아 1남 2녀가 장성할 때까지 한번도 학부모 자격으로 자녀들의 학교에 가 보지 못했다.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기 싫어 한번도 ‘현장’을 찾지 않았다가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나온 뒤 49년만에 처음으로 노근리 쌍굴다리를 찾았다는 정씨는 “지금도 어린이들이 많은 곳에는 놀림감이 될까봐 잘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총탄 파편에 맞아 왼쪽 눈을 실명한 양해숙(梁海淑·62·여·영동읍 회동리)씨는 “실명한 것이 부끄러워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고 털어놨다.

양씨는 또 “자녀들(2남 2녀) 결혼식에는 어쩔 수 없이 참석했지만 누가 될까봐 선을 볼 때나 상견례 등에는 ‘불가피한 일이 있다’며 피했다”고 말했다.

양씨는 “지금도 쌍굴다리 인근을 지나거나 TV에 폭력 장면이 나오면 공포감 때문에 청심환을 먹어야 잠을 이룰 수 있다”고 덧붙였다.

노근리양민학살진상대책위원회는 당시 부상자 100여명 중 정상적인 활동이 어려울 정도로 큰 장애를 입은 사람이 3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대책위 부위원장 양해찬(梁海燦·58)씨는 “부상자 중 상당수는 사실상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영동〓지명훈기자〉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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