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을 극복한 지도자들/요시다 前총리]패전속 日 재건

  • 입력 1997년 12월 6일 20시 48분


일본이 패전후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던 1946년 5월. 도쿄(東京) 시내에서는 수만명의 대규모 시위가 거의 매일 끊이지 않았다. 5월 19일 왕궁앞에 25만명의 군중이 집결했다. 천황제 타도를 내세우는 공산당 등이 주도한 집회장에는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온갖 요구사항이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그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조서(詔書:왕의 국민에 대한 말씀). 국체는 수호되고 있지, 짐(朕)은 배불리 먹고 있지, 너희 인민들은 굶어죽어라, 천황 서명 날인』 『아무리 일해도 우리는 왜 굶주려야 하는지 천황 히로히토는 대답하라』 패전후 「인간 선언」을 통해 「신(神)」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왕에 대해 상상키 어려운 조롱과 모독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실시된 성인 1인당 식량배급량은 하루 2백90g. 불에 탄 건물과 폐허더미 속에서 국민은 생활고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거리엔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도쿄는 「혁명 전야」처럼 불안했다. 그 무렵 신헌법초안이 발표되고 새 선거법에 의해 치러진 총선거에 따라 자유 진보당이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자유당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총재가 연합군사령부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됨으로써 정국은 요동쳤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하토야마는 당시 외상이었던 요시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연합군사령부도 외교관 출신으로 훌륭한 매너와 국제감각을 갖춘 그를 내심 좋아하고 있었다. 시대가 요시다를 부른 것이다. 당시 요시다는 67세, 정객으론 늦깎이인 셈이지만 어깨에 드리워진 짐은 무거웠다. 그는 즉시 내각을 구성하고 총리가 됐다. 맥아더에게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선 우선 국민을 먹여살리고 일자리를 주며 생활을 안정시키는 게 무엇보다 긴요하다』며 식량원조를 호소했다. 그는 경제 재건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사회를 혼란속에서 구하기 위해선 강력한 정권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하토야마 전총재에게 자신의 인사권에 일체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농정분야 등에 과감한 인재 등용책을 펼쳐나갔다. 그는 특히 전후 혼란이 혁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장 두려워했다. 과거 군부세력을 등에 업었던 우익과 급진 사회주의자들을 철저히 배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해 6월 그는 국회연설을 통해 『우리는 결코 용이하지 않은 사태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인 평화 국가 건설이라는 대사업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민주헌법 제정, 식량난 해결이라는 국가적 대과제를 당장 해결해야만 했다. 그는 신헌법에 천황제를 유지하고 무력행사를 포기하는 평화 조항을 넣어야 한다는데 적극 앞장섰다. 미국으로부터 60여만t의 식량을 얻어내는데 성공했으며 노동기준법 독점금지법 등을 잇따라 공포해 사회질서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인 47년 4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사회당에 1당자리를 내줘야 했으며 연립정권 제의를 뿌리치고 재집권을 스스로 포기했다. 사회당과 손잡을 수 없다는 「보수 본류」의 의지였다. 그는 48년 3월 보수 세력을 모아 민주자유당을 결성하고 총재에 취임, 그해 10월에 제2차 요시다내각을 발족시켰다. 제1라운드에서 평화헌법 제정을 성취한 그는 제2라운드의 목표를 강화조약을 통한 주권회복에 두고 있었다. 강화조약과 관련, 일본 정국은 「전면강화」와 「단독 강화」를 두고 들끓었다.그는 미국의 힘을 빌려 경제 발전을 이룩해야 하며 소련 중국 등을 포함한 「전면 강화」는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과의 「단독 강화」에 반대하는 학자들에 대해 자신이 직접 라디오에 출연해『곡학아세하는 세력은 용납할 수 없다』고 공박했다. 결국 52년 미국과의 강화조약이 맺어짐으로써 결실을 보았다. 또한 50년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미국이 일본의 재군비를 강력히 요구해 왔지만 그는 이를 과감하게 뿌리쳤다. 패전이 남긴 폐허와 냉전구조 속에서 요시다는 「친미」 「경무장」 「경제 우선」이 일본이 가야할 길이라고 갈파했다. 그가 놓은 초석이 오늘의 일본을 이루었다. 〈도쿄〓윤상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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