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지만 손 잡는다”… ‘트럼프 리스크’가 띄운 韓日 실용주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21일 18시 27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관련 동아일보·아사히신문 여론조사 심층분석 (한국정당학회 발표)

美우선주의 파고에 ‘반일 감정’ 억누르고 ‘안보·경제 협력’ 선택
20대 男 “일본 좋다” 43% vs 30대 女 18%
젊은층 안에서도 ‘성별 대분열’


21일 한국정당학회 연례학술회의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패널 회의’에 참석한 학계 전문가. 왼쪽부터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 교수, 조영호 서강대 정치외교학 교수, 유민영 고려대 연구원, 김성조 연세대 동아시아국제학부 교수, 김선일 경희대 국제학과 교수. 사진 임현석 기자 = lhs@donga.com
21일 한국정당학회 연례학술회의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패널 회의’에 참석한 학계 전문가. 왼쪽부터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 교수, 조영호 서강대 정치외교학 교수, 유민영 고려대 연구원, 김성조 연세대 동아시아국제학부 교수, 김선일 경희대 국제학과 교수. 사진 임현석 기자 = lhs@donga.com

일본에 아쉬움이 있고, 아직 신뢰가 부족해도 일단 안보와 경제를 위해 손을 잡아야 한다는 전략적 협력론이 한국 사회에서 부상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북핵 위협 고조와 ‘트럼프 2.0’ 시대의 불확실성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을 감정적으로 불편한 나라에서 현실적 파트너로 재정의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21일 숙명여대에서 열린 한국정당학회 연례학술회의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기념 패널 회의’에서는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이 올해 6월 발표한 공동 여론조사(한국 기준 국내 성인 1010명 대상, 리서치앤리서치(R&R)가 국내 여론조사를 진행)를 토대로 한 학계의 심층 분석이 쏟아졌다. 전문가들은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이 당위에서 실리로 대전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트럼프가 만든 ‘비호감 속 협력’… 50대의 변심 (김성조 연세대 동아시아국제학부 교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과 자국 우선주의 기조는 한국 내에서 반일이지만 협력이라는 새로운 여론 지형을 만들어냈다.”

김성조 연세대 동아시아국제학부 교수는 한국인의 대일 인식을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했다. 일본을 싫어하고 협력도 반대하는 전통적 ‘반일 그룹’, 일본을 좋아하고 협력도 찬성하는 ‘긍정적 협력 그룹’, 그리고 새롭게 부상한 ‘실용적 협력 그룹’이다. 김 교수는 실용적 협력 그룹을 일본에 대한 감정적 호감도는 낮지만, 미국의 관세 압박이나 방위비 증액 요구 등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일본과 연대해야 한다고 보는 집단으로 분류했다.

김 교수는 “통계적으로 보면 진보 진영을 지지하는 성향이 강한 50대 사무직 그룹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된다”며 “이들은 전통적으로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낮은 반일 그룹이지만, 트럼프 2기라는 불확실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과의 전략적 협력에는 동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김 교수는 새로운 집단의 실용 협력 의지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그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유럽연합(EU) 같은 깊은 신뢰 기반의 공동체가 아니다”라며 “경제적 이익을 위한 단기적이고 전략적인 제휴는 찬성하지만, 군사 협력과 같은 깊은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선을 긋고 있다”고 설명했다. 심정적인 거리감 속에서도 실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이번 조사에서 ‘첨단 분야 한일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은 70.0%, ‘방위 분야 협력 강화’는 59.7%에 달해, 높은 비호감도와는 별개로 실리적 협력에 대한 지지는 과반을 훌쩍 넘겼다.

●“과거사 해결” 10년 새 6배 급증… 안보 위기감이 대일 인식에도 영향 (조영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조영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가 해결됐다”고 보는 한국인의 비율이 2015년 3% 수준에서 2025년 17.3%로 10년 사이 약 6배 가까이 급증한 점에 주목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여전히 국민의 84.9%가 “일본의 사과가 미흡하다”고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을 선택한 비율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조 교수는 이를 안보 현실주의의 결과로 해석했다. 그는 “통계 분석 결과, 한미일 군사협력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느낄수록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답하는 경향이 뚜렷했다”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선행돼서가 아니라, 북한의 위협 등 안보 위기 속에서 한일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전략적 판단이 과거사 인식까지 변화시켰다는 진단이다.

여기에 한국의 국격 상승에 따른 국민적 자긍심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조 교수는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형성된 자긍심이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 여유를 불어넣어, 과거사에 매몰되기보다 미래를 보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조 교수는 “한일 관계는 역사적으로 여론보다 앞서가는 ‘엘리트 주도(Elite-driven)’의 성격이 강하다”며 “현재 국민들이 완벽하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양국 지도층과 실무 그룹이 신뢰를 쌓고 협력을 추진한다면 여론을 견인하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전망했다.

● 2030의 성별 분화… 문화에 대한 호감 큰 男 vs 역사 문제 먼저 떠올리는 女 (유민영 고려대 연구원)

미래 한일 관계의 주역인 2030세대 내에서는 성별에 따른 인식 격차가 벌어지는 점도 의미심장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유민영 고려대 연구원은 2030세대의 대일 인식이 젠더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는 현상에 주목한다. 분석에 따르면 20대 남성의 일본 호감도는 2015년 10.2%에서 2025년 42.9%로 수직 상승했다. 반면 30대 여성의 호감도는 17.6%에 머물러 전체 평균(23.0%)보다도 낮았다.

유 연구원은 “기성세대의 협력 인식이 북한 위협이라는 안보 요인에 의해 작동한다면, 젊은 층의 인식 변화는 문화적 호감도가 핵심 기제”라며 “2030 남성들은 애니메이션 등 일본 문화를 적극 소비하며 친밀감을 쌓고 이것이 안보 협력 지지로 이어지는 반면, 여성들은 위안부 문제 등 역사적 이슈와 젠더 문제에 더 의미있게 다루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조사에서도 일본 문화에 관심이 있다는 응답은 20대에서 65.8%로 가장 높았으나, 이를 호감으로 연결하는 방식은 성별에 따라 다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 연구원은 한일 양국의 문화와 정치의 연결고리 또한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2030 남성은 일본 문화를 소비하며 이를 보수적 실용주의라는 정치 성향으로 연결하지만, 일본의 경우 한국 문화를 즐기는 젊은 여성들이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역사 수정주의를 지지하는 등 문화 호감이 정치적 우호로 직결되지 않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유 연구원은 20대와 30대 사이에서도 인식 변화가 발생하는 점에 대해선 “20대는 일본에 대해 역사적 부채감이나 경제적 열등감 없이 동등한 이웃 나라로 바라보기 때문에 관계 개선에 훨씬 유연하다”라고 짚었다.

● “우리 외교 인식, 가까운 나라 이해하려는 의지조차 상실한 비정상적 상황은 아닐지”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 교수)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소위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명확한 대립 구도로 주변국을 인식하는 경향은 보수 성향 응답자에게서만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보수층은 미국을 좋아할수록 일본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동맹 일체감을 강하게 보이는 반면, 진보나 중도층에서는 이러한 이분법적 진영 논리가 상대적으로 옅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조사에서 보수 성향 응답자의 일본 호감도는 31.4%였으나, 진보 성향 응답자는 12.9%에 그쳐 정치 성향에 따른 인식의 양극화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흥미로운 대목은 일본을 좋아하면 중국을 싫어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이번 조사에서 실제로는 일본 호감도가 중국 호감도와 정(+)의 상관관계를 보였다는 점이다. 미·중 갈등 국면이라 해서 유권자들이 반드시 양자택일을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하 교수는 “오히려 주변국 전반에 대해 개방적이거나 혹은 무관심한 태도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인의 외교 인식이 지나치게 미국 일변도로 흐르고 있다는 진단도 조심스레 제기했다. 하 교수는 “지난 20년간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한국인이 가장 가깝게 느끼는 나라는 압도적으로 미국(80% 이상)이며, 일본을 꼽는 비율은 국제 정세 변화와 무관하게 항상 10% 수준에 고착화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는 단순히 미국을 선호한다는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가 일본이나 중국 등 가까운 이웃 나라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의지조차 상실한 비정상적 상황일 수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대학에서도 일본이나 중국 정치 수업을 듣는 학생이 줄고 관련 연구도 부족해지는 현실이다. 단순히 호불호를 떠나 주변국에 대한 관심의 베이스라인을 높이려는 노력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한일관계#전략적협력#반일감정#북핵위협#트럼프정책#과거사문제#2030세대#성별인식격차#외교인식#한미일군사협력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