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미술관의 주요 소장품 65점을 소개하는 전시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가 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개막했다. 내년 2월 22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선 클로드 모네, 페테르 파울 루벤스 등 귀에 익숙한 대가부터 히에로니무스 보스, 프란시스코 데 고야 등 마니아들의 인기 작가까지 여러 거장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눈여겨 볼 만한 작품을 선별해 주마다 소개한다.》
요즘은 고화질 사진이나 모니터로도 명작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관객이 굳이 명화전을 찾는 것은, 픽셀과 프린트로는 전해지지 않는 작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머리카락 한 올이나 무심하게 젖혀진 옷깃의 선에서 수십, 수백 년 전 화가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를 더듬어보곤 한다. 원화의 매력이다.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에선 붓 터치를 넘어 작가의 신체 흔적이 생생하게 남은 그림도 만날 수 있다. 바로 그림에 찍힌 ‘지문’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의 ‘푸른 눈의 소년’엔 그의 지문이 찍혀 있다.
1986년 이 그림을 기증받은 샌디에이고 미술관도 이 사실을 40년 가까이 몰랐다고 한다. 전시 큐레이터인 마이클 브라운 박사는 “보존연구팀이서울 전시를 위해 작품의 상태를 살피던 과정에서 그림 왼쪽 아랫부분에서 모딜리아니의 지문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미술관이 공개한 현미경 촬영 사진엔 캔버스 천 무늬 위로 구불구불하게 찍힌 지문이 선명하다. 브라운 박사에 따르면 엄지손가락 지문이다.
“모딜리아니가 물감이 마르기 전 캔버스를 이젤에서 내려놓으며 자국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손가락에 묻은 빨간 물감이 가장자리에 얼룩 형태로 남은 것도 확인됩니다.”
브라운 박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빈센트 반 고흐도 엄지손가락 지문이 남은 그림이 있다”며 “매우 놀라운 일이고 미술사적으로는 논문의 소재가 될 만큼 중요한 발견”이라고 덧붙였다. 미술관은 작품이 돌아오면 연구를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프랑스 파리에 머무르며 자기만의 화풍을 완성했던 시기인 1916년에 그렸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주변 아이들을 종종 모델로 삼곤 했다. 푸른 눈의 소년 역시 그중 하나로 추정된다.
소년의 타원형 얼굴, 길쭉한 코와 가느다란 목 표현은 모딜리아니의 ‘트레이드 마크.’ 모딜리아니는 이 무렵 파리 예술가들이 엄청난 호기심을 가졌던 아프리카의 가면과 조각에서 이러한 표현의 단서를 얻었다. 이런 독특한 표현으로 전통적인 인물화에서 벗어난 모딜리아니는 앞에 앉은 사람을 보는 자기의 ‘마음’을 그리고 싶어 했다. 이러한 의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흐릿한 눈동자다.
이 작품에서 모딜리아니는 소년의 눈동자를 선으로 그리긴 했지만, 눈의 흰자와 눈동자를 모두 푸른 색으로 칠해버렸다. 어떤 초상화에선 한쪽 눈을 눈동자 없는 회색으로 그리기도 했다.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는 궁금증에 모딜리아니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될 때 눈동자를 그리겠습니다.”
눈동자를 자세히 표현하지 않은 그림. 작품 속 인물의 마음은 ‘신비로움’의 영역으로 남겨진다. 관객은 흐린 눈동자 너머에 있을 소년의 내면을 어림잡아 더듬어 볼 뿐이다. 100년 전 파리의 누추한 화실에서 모딜리아니가 남긴 엄지손가락 자국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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