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박지하 칼럼] KBS ‘다큐멘터리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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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3일 10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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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포가 아닌 국내 '여행' 다큐멘터리의 최고봉

쌓이는 스트레스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때는 여행 다큐멘터리를 본다.

여행 다큐는 허구가 아닌 현실의 기록이지만 일상에서 시청자를 건져내어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간다는 점에서는 드라마와 공통점이 있다.

드라마가 일상에 존재하지 않는 멋진 용모의 남녀들과 짜릿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를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놓는다면, 여행 다큐는 일상에 존재하지 않는 풍광과 풍물을 통해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간다.

여행자의 눈으로는 평소 지나치던 것들을 다시 보고, 평소에는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던 것들도 느긋한 마음으로 보아 넘기게 된다. 그들에겐 그저 매일 가는 동네슈퍼도, 하나 특별할 것 없이 진행되는 결혼식도, 하루하루의 밥벌이도 여행자에겐 모두 흥미롭다.

사라져가는 골목길의 추억-종로 피맛골. KBS 제공
사라져가는 골목길의 추억-종로 피맛골. KBS 제공


도피를 원할 땐 여행 다큐를

상하이나 동경이나 파리의 지하철은 우리나라 지하철과 아주 비슷하지만, 여행을 떠나서라면 그런 낯익은 풍경에도 놀란다. 아니, 이렇게 비슷하다니.

같든지 다르든지 감탄할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에는 감탄스러운 것뿐이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감탄할 준비가 되어 살아간다면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정말로 즐기는 최고의 방법은 일상을 여행하듯 사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여행 다큐의 최고봉은 우리의 일상을 여행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요즘 공중파에서 볼 수 있는 여행 다큐의 최고봉은 KBS의 '다큐멘터리 3일(이하 다큐3일)'일 것이다.

다큐3일은 우리가 종종 지나치던 곳이지만 그곳으로 떠나본 적은 없는 곳들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마치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푸켓으로, 페루로, 이탈리아의 어느 섬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듯이 다큐3일은 남산으로, 인천공항으로, 덕수궁 돌담길로, 때로는 서울 사는 나에게는 정말 여행지인 지방의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우리의 평범한 이 장소들이 조금 달리 보면 여행지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큐3일의 재미는 여행지 선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재미있는 여행 다큐가 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화면구성 이상의 것이 필요한 법이다. 세계 각국의 디지털 이미지들이 인터넷을 통해 넘쳐나는 요즘, 한 시간 동안 책받침 사진만 보여줘서는 관심을 끌 수 없다. 하물며 스펙타클한 풍광이 나올 것이 없는 우리 주변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다큐멘터리 3일-영양 버스터미널.
다큐멘터리 3일-영양 버스터미널.


여행이란 개방적 공간을 사적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과정

스펙타클한 풍광이 잘 담겨있는 관광홍보용 비디오나 홍보 사진보다 난데없는 줌과 클로즈업, 갑자기 흐름이 끊기는 나레이션 등 살짝은 어설픈 느낌의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더 재미있던 이유는 여행지의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단지 피요르드 지형이나 화산활동의 결과가 궁금하다면 자연 다큐를 볼 일이다. 세계지리시간에 배운 이국적 지형과 풍광은 등장인물들과 성우의 나레이션을 통해 여행자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그래서 재미있어진다.

여행은 미지의 개방된 '공간'을 개인적 의미가 담긴 '장소'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런 곳이 있긴 있다던데'라는 느낌의 막연한 곳, 마치 사이버스페이스나 다름없던 공간들은 여행을 통해 그 실제가 확인되고 개인적 기억과 결합되는 장소가 된다. 여행 다큐의 재미는 시청자를 대신해서 저 멀리 있다던 '공간'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장소'로 바꾸어 주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큐3일은 3일이라는 시간을 통해 공간을 장소로 만든다. 처음 카메라가 도착한 공간은 3일이라는 시간을 거쳐 내러티브가 형성되고 의미가 부여되는 장소가 된다. 서울 복판에 존재하던 남산이라는 지형지물은, 다큐3일을 보는 동안은 나와 개인적 관계를 형성하는 장소로 존재한다. 모두 어디론가 멀리 보내기 위하여 존재하는 장소인 인천공항은 그 자체로 이야기를 가지는 장소로 바뀐다.

흘러지나가는 것이 여행의 속성이긴 하되, 한번 사진 찍고 떠나는 여행객이 아니라 그 곳에서 상당시간을 보낸 장기여행자의 시각이랄까. 3일이란 짧다면 짧지만 우리는 이미 그곳의 풍광에 대해서는 새로 감탄할 필요가 없으니 이미 풍광에 익숙해진 장기 여행자들끼리의 대화가 바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부산 감천항 72시간.
부산 감천항 72시간.


르포란 다시 살펴보면 잘 꾸며진 여행기다

때로는 첫째 날 만난 사람이 둘째 날이 되면 다른 이야기, 더 깊은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한다. 처음에 자신의 일에 대해 다소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충무로 인쇄골목의 젊은 사장이 다시 찾아온 카메라를 향해 그동안 다시 생각해 봤다면서 자신의 일과 꿈에 대해 말할 때, 충무로 인쇄골목은 우리에게 단순한 재개발 대상 골목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떤 곳이든 정이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보여주지 않던 것을 보여주는 것 혹은 보이지 않던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 방송을 보는 우리는 3일간의 변함 혹은 변치 않음이 우리와의 상호작용의 결과 인 것처럼 느끼게 되고 그래서 정이 든다.

훌쩍 떠나고 싶어도 우리의 발목을 잡는 짧은 휴가 기간을 탓하거나 빠듯한 여행 예산을 아쉬워하고 있지만 말자. 내일 아침에는 출근길 여행 사진을 찍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다큐 3일은 그래서 여행다큐의 최고봉이다.

박지하 / 칼럼니스트 jiha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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