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강유정]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29일 14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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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 깊지만 어설픈 S.F 로맨스의 매력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익숙한 공상에 대한 로맨스다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익숙한 공상에 대한 로맨스다

시간여행은 S.F일까 판타지일까.

과학적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 이론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것은 S.F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족이나 호빗족처럼, 아예 공상 속에서나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시간 여행은 판타지일 것이다. 과학적 원리를 따져보자면 시간여행자는 S.F적 인물이다. 복잡하긴 하지만 이론상으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고들 하니까 말이다.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자신의 인생 궤도 안을 끊임없이 맴도는 시간 여행자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 중요한 순간들에 마치 방점을 찍듯 들른다. 결혼식에 당시의 주인공과 미래의 늙은 주인공이 동시에 온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죽음을 먼저 목격하기도 한다. 총에 맞은 미래의 그가 현재 그의 시간대로 시간 여행을 와서 알게 된 사실이다.

상상 혹은 공상

시간여행의 역사는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간다. 어느 동굴에 들어가 하루 신나게 즐기다 나왔더니 도끼자루는 썩고 세상이 바뀌었더라는 민담부터 죽은 아내를 구하러 사후 세계로 가는 그리스 신화까지. 조금씩 그 모습은 다르지만 시간 여행 모티프는 반복되어 왔다.

아마, 가장 유명한 시간여행 영화는 바로 '백 투더 퓨처'가 아닐까? 이상하게 생긴 자동차를 타면 승객은 과거, 미래 어느 시간대든 갈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은 시간대에 가기도 하고, 자신의 후손이 살고 있는 곳을 염탐하기도 한다. 아마, '백 투더 퓨처'는 우리가 시간 여행에 대해 떠올리는 여러 가지 상상들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 중 하나다.

그런데, 말이다. 만일 시간 여행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그러니까,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 때나, 무시로, 부지불식간에 내 육체가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진다면 말이다. 그런 시간여행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시간 여행에 대해 해보지 않았던 질문을 던져준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더 매력적이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더 매력적이다


사랑 그리고 시간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제목에서 짐작되다시피, 로맨스 영화이다.

영화는 6살 때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는 한 소년에서 시작된다. 사고의 순간 소년은 자신의 몸이 사라져감을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잠시 후, 소년은 사고 직전의 순간으로 약간 이동해, 차에서 사고를 당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시간 여행 최초의 지점이며 소년에게는 엄마를 잃은 상처의 시간이다.

주인공 헨리는 동영상 플레이어의 책갈피처럼 인생이라는 런닝 타임 곳곳에 책갈피를 꽂아둔다. 책갈피를 클릭하면 그 시간대로 점핑해서 이동하듯, 헨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 곳곳을 누빈다. 문제는 헨리가 이 시간여행을 조절할 수 없다는 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시간 여행은 헨리의 신체에 국한된 마술이기에 옷가지는 함께 다른 시간대로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시공간에 그는 알몸으로 던져진다. 마치 미래로부터 온 전사 터미네이터처럼 말이다.

시간 여행은 바야흐로 '터미네이터'에서 철학과 만난다. 알다시피, '터미네이터'는 미래의 반군지도자를 없애기 위해 미래로부터 암살범이 온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없애러 온 사람이 어린 존 코너가 아니라 그를 잉태할 예비엄마라는 것이다. 그는 아예 존 코너의 수정을 방해한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암살을 막기 위해 미래로부터 온 아군이 바로 존 코너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이 쯤 되면 복잡해진다. 존 코너가 보낸 사람이 존 코너 아버지라니. 그렇다면,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그런데,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고전적 시간 여행 영화가 가진 이런 문제점들은 가볍게 지나쳐 버린다. 가령,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마주친다면 현재의 내가 죽는다거나 아니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의 문제는 쏙 빼놓는다. 영화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불시의 만남도 가능하지만 있어야만 하는 곳에서 그는 종종 부재중이다.

어불성설의 매혹

로맨스를 살리고 시간 여행의 복잡성을 버리니 색다른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가령, 시간 여행의 유전적 성향때문에 뱃속의 아이도 자꾸 엄마의 자궁을 벗어난다. 아내가 셀 수 없이 유산을 하자 헨리는 정관수술을 받고 온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있다. 어찌된 일일까? 비밀은 바로 시간 여행이다. 과거로부터 온 헨리는 미래의 아내와 카섹스를 나눈다. 정관 수술을 받은 현재의 헨리는 소쇼파 위에서 자는 데 이 사실을 알리 없는 과거의 헨리는 행복에 겨워 미래의 아내를 안는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말이 안 되는 덫 투성이다. 아내 클레어는 어떻게 평생 한 남자만을 기다릴 수 있을까, 그것도 아주 가끔씩 불쑥 나타나 5분도 채 같이 있어주지 않는 남자를.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남자가 어떻게 직장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시시때때로 나체로 유체이탈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 영화는 그렇게 시시콜콜 따지지 말고 그냥 달콤하게 이 여행을 즐겨 보라고 말한다. 따지자면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 자체도 허무맹랑하기는 마찬가지다. 헨리라는 인물을 통해 영화가 그려내고 싶어하는 것은 불시의 이별이라는 상황에 압축된다. 깊이 사랑하는 두 남녀에게 불시의 이별은 불치병만큼이나 치명적이다.


끝없는 시계태엽감기

시간 여행 영화 중 'Somewhere In Time'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시간 여행은 자기 최면으로 이뤄진다. 사람들은 시간 여행 영화에서 과학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낭만을 기대한다. 미국에는 INSITE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그랜드 호텔에 매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 역시도 이런 분위기 속에 놓여 있다.

시간은 강물과 같아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어제의 일이 후회되고, 방금한 말이 수치스럽다 해도 되돌릴 길은 없다. '이미 내뱉은 말'이라는 말 속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체념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시간 여행을 상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듯싶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누구나 되돌아가고 싶은 책갈피 된 시간이 하나쯤은 있기 때문에. 행복과 후회 가운데서 순간은 자꾸 리와인드된다.

기억은 시간 여행을 너무, 많이, 한다.

과학의 결과물, 유전, 자기 최면이든 아니면 나이를 거꾸로 먹는 사람이든 간에 이런 상상력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공상이다. 만일, 영화가 허락한 자유가 있다면 시간의 일회성을 마음대로 조직하는 것이 아닐까? 말은 안되지만, 시간여행자가 매혹적인 까닭이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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