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전을 울리는 불편한 메시지 “아무도 믿지 말라”… ‘블랙북’

  • 입력 2007년 3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나치 레지스탕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블랙북’. 사진 제공 유레카픽처스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나치 레지스탕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블랙북’. 사진 제공 유레카픽처스
배우의 노출만이 외설의 기준이라면 29일 개봉한 ‘블랙북’은 분명 포르노에 가깝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한 나치 레지스탕스 영화.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적군의 본거지로 침투할 스파이 임무를 맡는 갈색 머리의 레이철(카리세 판 하우턴)은 유대인임을 감추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발로 물들인다. 의사 출신의 레지스탕스 리더 한스(톰 호프만)와 관객 앞에서 적나라하게.

여기서 생각해 보자. ‘원초적 본능’이 포르노인가? 그렇지는 않더라도 ‘원초적 본능’의 폴 버호벤 감독은 모국 네덜란드의 실화로 또다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레이철이 자신의 매력을 십분 발휘해 나치군 장교인 문츠(세바스티안 코흐)를 유혹하는 과정이 그렇고, 나치와 내통하는 배신자의 음모와 반전이 그렇다.

처음 레이철이 스파이가 되는 동기를 들여다보면 훌륭한 ‘명화극장’용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탈출하려다 가족이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은 뒤 더는 잃을 것이 없다고 여기며 마타하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불편함은 스릴러의 색채가 짙어질수록 더욱 심해진다. 인간의 역겨운 탐욕은 조국애나 휴머니즘, 정의의 빛을 바래게 한다. 다만 온몸을 내던진 하우턴의 열연은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뒤 “이 세상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며 오열하는 모습은 연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 잠시 자신이 배우라는 것을 잊은 듯 하우턴은 온몸의 근육을 동원해 전율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고 안심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슬퍼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그 슬픔마저도 이용하는 배신의 덫이 아주 가까이 있다. 일찌감치 레이철의 아버지 친구라는 변호사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이 영화에서 하우턴의 오열 연기 외에 하나 더 건진 것이 있다면 ‘아무도 믿지 말라’는 교훈이다. 적어도 영화를 보면서는 말이다. 버호벤은 역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감독이다. 18세 이상.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