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향기’의 혜원은 내숭쟁이?
서울대 의대 흉부외과 이정렬 교수는 “심장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다만 뇌의 명령에 따라 심장이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며 “여주인공(혜원)의 심장이 쿵쾅거린 것은 심장 자체가 흥분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자(민우)를 여주인공 자신이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첫사랑의 심장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심장이 혜원에게 들어왔더라도 민우를 보고 똑같이 쿵쾅거렸으리라는 것. 혜원은 내심 마음에 드는 남자를 발견하자 약혼자인 정재(류진)에게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고, 이런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까?”하고 이식된 심장 탓으로 돌리는 무의식적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분석된다는 것이다.
이식된 심장은 흥분 시 박동수의 상승 속도와 최대 박동수 등이 정상 심장에 비해 낮게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다. 심장을 꺼내는 과정에서 심장과 연결되었던 신경들이 잘려나가 뇌의 자극 전달통로가 단절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뇌에서 분비되는 카테콜라민 등 호르몬이 심장을 자극, 맥박을 빠르게 하는 역할을 대신한다. 혜원의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쳤다는 것은 결국 혜원의 뇌에서 다량의 호르몬 분비를 지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흉부외과 박표원 교수는 “이식된 심장에 대한 체내 거부반응을 막기 위해 복용하는 면역억제제 때문일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면역억제제에는 호르몬제인 스테로이드 성분이 포함된다. 스테로이드제는 밥맛이 나게 하는 등 몸의 활력을 높이는 효과를 낸다. 이에 따라 혜원은 매사에 의욕이 넘치고 쉽게 흥분하는 성향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 잘 생긴 민우를 보자마자 심장이 강하게 뛰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면역억제제 복용 탓에 면역력이 떨어질 수 있음을 감안할 때, 꽃가루 알레르기를 앓거나 가시에 찔려 감염될 위험이 높은 플로리스트를 혜원의 직업으로 설정한 것은 의학적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 ‘첫사랑’의 준희는 도착증 환자?
잠자다 깨어난 준희가 눈앞에 선 희수(조안)를 꿈 속 첫사랑과 동일시하는 것은 데자뷔(deja vu·기시감·旣視感) 현상으로 분석된다. 데자뷔는 최초의 경험인데도 이미 보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고 느끼게 되는 심리상태. 머리모양, 짙은 눈썹, 좁은 턱 등 외양의 일부가 유사한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신경세포의 정보전달 과정상 혼란으로 인해 처음 보는 것을 익숙한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 비롯되기도 한다.
희수는 △작은 키와 통통한 몸매 △둥근 얼굴 △어린 나이 △긴 생머리인 반면, 준희의 첫사랑은 △큰 키와 늘씬한 몸매 △갸름한 얼굴 △연상 △쪽진 파마머리를 하고 있어 양자간 유사성을 찾긴 어렵다. 심리전문 웹진 슈레21(shure21.co.kr) 대표 최창호 박사(심리학)는 “준희는 정신적 질환을 가진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면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준희 앞에 희수 아닌 그 어떤 여성이 있었더라도 준희는 ‘첫사랑과 너무 닮았다’면서 일로매진(一路邁進)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준희는 실패한 사랑을 꼭 완성시켜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첫사랑과 어떤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은 희수를 첫사랑으로 ‘치부한다’는 것. 준희의 심리상태는 틀린 시험문제를 더 잘 기억하듯, 미완성된 과제에 집착하며 이를 완성시키려는 행위를 지속하는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로 해석된다.
희수를 첫사랑과 동일시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가 작용했기 때문으로도 분석된다. ‘첫사랑과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아내인 서경(김지수)을 배신하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다는 것.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로부터 자신의 자존심을 보호하는 ‘구실 만들기 전략(Self Handicapping Strategy)’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고 최 박사는 분석한다.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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