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유출 빨간불]
첨단기술 해외 이전 4년새 22건→82건 4배로…공급망 재편 속 기술 유출 ‘빨간불’
반도체-배터리 기술 수출 증가세… 해외 韓공장 완공땐 더 늘어날듯
‘합작-이전’ 명분 유출 우려 커져… “유출 방지용 보호장치 정비해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속도를 내면서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산업 분야 국내 기업들의 ‘기술 수출’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에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사전 및 사후 보호장치를 빈틈 없이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6일 국민의힘 이종배 의원실이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받은 국가핵심기술 수출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8년 27건이었던 심의·신고 건수가 지난해 87건으로 늘었다. 심의를 통과해 ‘승인’을 받았거나 신고가 ‘수리’돼 실제 해외로 이전된 기술은 같은 기간 22건에서 82건으로 4년새 4배로 증가했다.
정부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전기전자, 자동차 등 12개 분야 73개 기술을 국가핵심기술로 지정하고 있다. 이 중 정부 지원을 받아 개발한 기술은 산업기술보호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거쳐야 수출할 수 있다. 지원을 받지 않은 기술은 신고만 하면 되지만 사후 관리를 받는다.
미국과 유럽이 핵심 공급망 확보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국내 기업의 기술 수출은 반도체와 전기전자(배터리 포함) 분야에서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지난해 반도체 기술 수출 심의·신고는 21건으로 전년(14건) 대비 50% 늘었다. 같은 기간 전기전자는 7건에서 13건으로 2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북미, 유럽, 동남아시아 등에 짓겠다고 발표한 한국 반도체, 배터리 공장이 완공되고 양산 시점에 이를 경우 기술 해외 이전 속도는 더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기술 수출 사례가 급증할수록 기술 유출 가능성도 함께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배터리 합작회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배터리 안정성 검증을 이유로 핵심 제조 노하우가 담긴 실험 데이터를 요구받았다. 국가 승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앞으로 모든 요구를 외면하긴 힘들 거라는 게 걱정이다. 삼성SDI는 협력을 논의하던 미 전기차 업체 리비안이 민감한 정보를 넘겨 달라고 해 양사 간 협력 자체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호진 단국대 법학과 교수는 “기술 수출은 해외에서 한국의 기술력이 인정받는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만큼 핵심 기술이 해외 기업으로 빠져나갈 우려도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中대체’ 美-베트남 기술 수출 급증 해외공장 설립-현지인 고용 과정서 노하우-부품 공급망 등 노출 가능성 정부, 기술유출 방지제도 정비 착수… “기업 해외진출 발목 우려” 지적도
미국 진출을 위해 현지 기업과의 합작법인(JV) 설립을 추진 중인 국내 배터리 소재 기업 A사는 ‘기술 유출 우려’를 이유로 지난해 9월 정부로부터 수출 ‘불승인’ 처분을 받았다. 국가핵심기술로 분류된 A사 기술은 정부 지원을 받아 개발됐다. 그래서 산업통상자원부가 구성하는 산업기술보호위원회의 사전 심사를 통과해야 수출이 가능하다.
산업부는 당시 불승인 이유로 “국내 산업 경쟁력과 국가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된다”고 밝혔다. 또 “기술 이전에 대한 구체적 사유가 부재하고 기술 보호 및 유출 방지를 위한 보안 대책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A사가 수출하려는 기술 분야는 배터리 원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소재다. A사는 올 초에도 미국 전기차 업체와 수조 원대 공급계약을 맺으며 주목받았다. A사 측은 “미국 진출 계획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며 “JV의 지분 구조를 비롯해 산업부와 협력사 양쪽 요구사항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조율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 현지 정부·기업·인력…“새어나갈 구멍 많아져”
전문가들은 기업 의지와 상관없이 기술의 해외 이전이 늘어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술 유출 위험성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현지 공장을 세우는 과정에서 해외 정부가 자국민을 일정 비중 이상 채용할 것을 요구하거나 특정 정보를 제공하라는 조건을 달아 지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임형주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해외에 공장을 새로 짓거나 증설을 하면 현지 인력과 인프라를 쓸 수밖에 없다”며 “기술적인 노하우는 물론이고 원재료나 부품 공급망 정보들이 자연스럽게 노출될 수 있다”고 했다.
현지 인력이 경쟁 기업으로 이탈할 가능성도 커질 수 있다. 한국에서보다는 아무래도 기밀이 새어나갈 구멍이 많아진다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밖을 벗어나면 더 좋은 조건을 통한 이직이나, 기밀을 경쟁사에 넘기는 데 대한 대가 등 기술 유출 시도가 더 노골적으로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등 국가 핵심 산업을 둘러싸고 공급망 유치 경쟁이 심화될수록 국내 기업 대상 기술 공유 또는 이전에 대한 요구가 커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지난해 정부 심의를 통과했거나 신고 수리된 기술이 가장 많이 향한 곳은 역시 중국(23건)이었지만 전년(22건)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대신 공급망 대체지로 떠오른 미국(13건→20건), 베트남(1건→6건)으로의 기술 수출이 부쩍 늘어났다.
● 사각지대 없애려는 정부 vs 해외 진출 서두르는 기업
국가핵심기술 중에도 정부의 사전 승인 후 수출되는 사례보다는 먼저 신고만 하고 사후 관리를 받는 비중이 더 크다는 점도 변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지난해 산업기술보호위원회의 심사를 받은 뒤 승인받은 기술은 23건이고, 산업부에 신고한 뒤 수리 통지를 받은 기술은 2.5배가 넘는 59건이었다. 최근 5년 사이 산업기술보호위원회 심사에서는 총 92건 중 5건이 탈락했지만, 신고의 경우 236건 중 산업부가 수리하지 않은 사례는 아예 없었다. 정부 및 관련 업계에 따르면 심사 후 승인 절차는 보통 3개월에서 길면 1년이 걸리지만, 신고는 2개월 이내로 처리된다. 단지 정부 지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고만 하고 해외로 나간 기술들이 특히 사각지대에 놓였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기업들은 반대로 기술 해외 이전 조건이 지나치게 엄격할 경우 공급망 재편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등 해외에 공장을 짓고 사업을 확장하려는 기업의 이해관계와 기술 유출을 우려해 막는 정부 입장이 충돌하는 것이다.
산업부는 지난달 30일 산업기술보호법 개정 방향성을 발표하며 기술 유출 우려를 최소화할 본격적인 제도 정비에 착수했다. 기업 인수합병(M&A) 심사 강화, 해외 이전된 기술의 재이전 시에도 승인 및 신고 대상 포함 등 안전장치 강화가 주요 내용이다.
국민의힘 이종배 의원은 “미중 패권 다툼 속 국가 경쟁력의 핵심 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제도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라며 “동시에 해외로 나가는 기업들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업계 의견을 충실하게 반영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