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묶인 혁신… ‘세계 50대 스마트기업’에 한국은 없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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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길 급한 ‘혁신성장’

#1.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발행하는 ‘MIT테크놀로지리뷰’는 6월 ‘2017년 50대 글로벌 스마트 기업’을 발표했다. 비즈니스 모델의 효율성과 기술 혁신성이 선정 기준이었다. 1위는 세계 최대 그래픽처리장치(GPU) 생산 업체인 엔비디아, 2위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우주기업 스페이스X였다. 3위는 온라인 전자상거래 공룡인 아마존이었다. 미국 기업은 1∼3위를 포함해 모두 31곳이었다. 중국, 대만, 영국, 독일 등의 기업이 이름을 올렸지만 한국 기업은 한 곳도 없었다.

#2. 미국 경제전문지인 포브스가 매년 발표하는 ‘가장 혁신적인 성장기업’에서 올해 상위 25개 중 일본과 중국 기업은 각각 4곳, 3곳이 포함됐다. 한국 기업은 없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KPMG가 지난해 선정한 세계 100대 혁신 핀테크 기업에도 한국 기업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미국(25개), 영국(12개), 중국, 호주(이상 9개) 등과 큰 격차다.

한국의 혁신 경쟁력이 글로벌 시장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국무회의에서 혁신성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도 이런 위기감이 깔려 있다.

문 대통령은 “소득주도 성장이 수요 측면에서 성장을 이끄는 전략이라면, 공급 측면에서 성장을 이끄는 전략이 혁신성장”이라고 했다. 새로운 산업군을 육성해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고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전략으로 읽힌다. 정보기술(IT) 부문을 포함한 벤처 업계와 경제 전문가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아마존과 구글을 탄생시키기 위한 첫 단추는 ‘혁신’의 뒷다리를 잡았던 규제를 대폭 개선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빅데이터, 바이오, 자율주행자동차, 드론 등 미래 먹을거리 산업은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있다. 동시에 후발 주자라 여겼던 중국과의 격차는 빠르게 줄거나 오히려 역전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2014년도 기술수준 평가’를 토대로 산출한 한국의 4차 산업혁명 기반산업 기술의 종합점수는 77.4점이었다. 미국(99.8점), 유럽연합(92.3점), 일본(90.9점)에는 크게 뒤처졌다. 중국 종합점수는 68.1점으로 한국과 점수 차가 10점 이내로 좁혀졌다.

한국의 거미줄 규제가 결정적 원인으로 꼽힌다. 아산나눔재단과 구글캠퍼스 서울이 7월 발표한 ‘스타트업코리아 정책 제안 발표회’ 연구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규제 장벽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CB인사이츠가 선정한 세계 100대 스타트업(투자액 기준) 중 57곳은 한국에서 창업했다면 규제 탓에 사업을 시작도 하지 못했거나 조건부로만 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

차량공유 서비스업체 ‘우버’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에 저촉된다. 개인의 유전자 정보를 활용한 치료법으로 주목받는 제약회사 ‘모더나’는 국내에서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사업을 할 수 없다. 중국의 원격의료 업체인 ‘위닥터그룹’도 한국 의료법 때문에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회사다. 한국은 선진국 대비 개인정보 보호 관련 규제가 강해 핀테크 기업의 성장이나 유전자 정보 활용 치료법 개발 등이 모두 막혀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원유’로 불리는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도 어려운 편이다.

규제 개혁과 관련한 전문가들의 조언은 단순하다. 우선 혁신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선(先)허용 후(後)규제의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기업이 혁신 제품과 서비스를 자유롭게 시험해볼 수 있는 ‘규제 샌드박스’가 하루빨리 도입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박희재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혁신성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현장의 기업들이 체감하는 규제가 무엇인지 먼저 듣고 세부 정책에는 이를 최우선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민화 창조경제연구회(KCERN) 이사장은 “모든 사업이 장벽을 넘어 융합하는 시대다. 사전 규제에서 사후 규제로의 전환이 필요한데 규제의 사회적 비용과 이익을 비교하는 시스템부터 갖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부가 지금이라도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하면 이 같은 규제 편익을 분석하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혁신성장의 접근 방식을 대기업과 중소·벤처기업으로 획일적으로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기업 규모에 따른 규제 적용보다는 파트너십을 유도해 시너지를 창출해야 한다는 얘기다.

안건준 벤처기업협회장은 “대기업과 벤처기업 간 인수합병(M&A)이 활발한 해외에 비해 국내는 각종 규제로 M&A가 활성화돼 있지 않다”고 했다. 그는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인수하면 바로 계열사로 포함돼 각종 규제에 발목을 잡힌다. 그러면 작은 기업이 가졌던 장점도 사라지게 된다”고 덧붙였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기업이든 중소·벤처기업이든 기존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업을 한다면 과감히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해당 분야에 대해 법인세 인하 등의 인센티브를 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신수정 crystal@donga.com·임현석 기자
#혁신성장#스마트기업#한국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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