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보복 엎친데 통상임금 덮치면… 기아차 “경영위기 우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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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임금 ‘화약고’

《2015년 10월 서울고등법원은 한국GM, 서울고속, 남부발전의 통상임금 소송에 대해 엇갈린 결론을 냈다. 법원은 이 3곳의 근로자들이 낸소송에서 상여금을 통상임금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신의성실 원칙(신의칙)’ 인정 여부에서는 판결이 엇갈렸다. 전년도 기준 누적 당기순손실 8690억 원을 기록한 한국GM과 임금청구액이 전년도 당기순이익의 100%가 훌쩍 넘는 서울고속 소송에서는 회사가 근로자들에게 추가 수당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반면 추가 청구액이 전년 당기순이익의 약 3.5%인 남부발전 소송에서는 근로자들이 승소했다. 》


재계 관계자는 “2013년에 나온 대법원 판결에서 신의칙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판사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날 수 있어 기업들은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기아자동차의 통상임금 소송 1심 선고가 17일로 예정되면서 재계와 노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대 3조 원에 이르는 이번 소송에서 신의칙 인정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인정받아 신의칙이 적용되면 사측이 패해도 소송 금액의 전체나 일부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통상임금 선고를 앞둔 기아차 사측은 최근 법원의 유사 소송을 지켜보며 긴장하고 있다.

기아차 노조는 2011년에 6869억 원의 집단소송을, 2014년에는 조합원 13명이 약 4억8000만 원의 대표소송을 제기했다. 대표소송에서 노조 측이 이기면 전 직원에게 확대 적용된다. 이번 1심 선고는 집단소송과 대표소송이 동시에 진행된다. 노조 측이 이기면 사측이 부담해야 할 금액은 약 1조 원. 임금의 소멸시효가 3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아차 사측이 패소할 경우 소급분까지 포함해 노조에 최대 3조 원의 돈을 돌려줘야 한다.

현대자동차는 상여금의 고정성이 인정되지 않아 2015년 1, 2심에서 노조가 사실상 패소했다. 하지만 기아차는 현대차와 달리 상여금 지급 규정에 ‘두 달 동안 15일 미만을 근무한 자에겐 상여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없다. 기아차가 이번 소송에서 불리하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기아차의 2분기(4∼6월) 매출액(연결 기준)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6% 줄어든 13조5784억 원, 영업이익은 47.6% 급감한 4040억 원에 그쳤다. 최대 3조 원에 이르는 통상임금을 부담할 경우 당장 올해 적자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게 사측의 주장이다.

사측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여파로 중국 판매가 반 토막 나는 등 실적이 부진한 상황에서 수조 원에 달하는 금액을 부담하면 올해는 물론이고 향후 경영 위기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동차산업은 부품업체 등 전방위 산업 연관 효과가 큰 만큼 향후 미칠 파장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아차는 비록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기존의 노사합의 내용, 최근 경영 실적, 자동차 산업의 최근 경기 상황 및 향후 전망 등을 고려해 법원이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의칙 인정 여부는 대법원이 2013년에 밝힌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2013년 말 대법원은 신의칙의 적용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정기상여금 비율이 높고, 고액의 초과근로수당이 지급되는 기업은 신의칙에 따라 추가 수당 청구가 인정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하급심 중에는 현금성 자산, 이익잉여금, 주주 배당금 등과 소송 및 판결 시점의 기업 현황 등으로 판단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2015년 2월 현대중공업 근로자 10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 소송에서 재판부는 “회사 경영 사정이 악화됐지만 이를 이유로 근로자들에게 불이익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2016년의 항소심에서는 “회사가 2014년 이후 거액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하고 있어 이 돈을 추가로 지급하면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며 기존 판결을 뒤집었다.

2015년 10월 서울고법은 한국GM 선고에서 자동차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하기도 했다. 최근 자동차산업계가 신기술 개발 경쟁으로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연구개발(R&D)이 중단되면 향후 심각한 경영상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해 신의칙을 인정했다.

재계는 통상임금을 둘러싼 모호한 기준들이 노사 간의 갈등은 물론이고 국내 산업계에 장기적으로 불필요한 비용을 초래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해 상반기(1∼6월)에 조사한 종업원 500인 이상 25개 기업에 제기된 통상임금 소송은 총 86건이다. 기업별로 평균 3.4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박기성 성신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해 ‘통상임금의 사회적 비용’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통상임금의 범위 확대로 기업 성장이 저해를 받으면 2016년 경제성장률이 0.13%포인트 하락하면서 향후 5년간 사회적 비용이 32조6784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세진 mint4a@donga.com·서동일 기자

※ 통상임금

근로자에게 정기적 일률적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임금으로 기본급과 직책·직무수당 등이 포함된다. 휴일·야근수당이나 퇴직금을 계산하는 기준이기 때문에 통상임금이 오르면 수당과 퇴직금도 함께 오른다. 2013년 대법원이 통상임금의 기준을 제시한 이후 개별 기업의 상여금 등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는지가 쟁점이 되고 있다.
#기아자동차#통상임금#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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