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진심-배려 없는 소통은 실체없는 소통일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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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희랍어 시간’(한강·문학동네·2011년)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선천적 질병으로 눈이 서서히 멀어간다. 여자 주인공은 이혼을 한 후 딸의 양육권을 잃게 되면서 입 밖으로 단어를 뱉을 수도, 종이 위 글자를 읽을 수도 없게 된다. 빛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는 희랍어 강의 교실에서 만난다. 남자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선생님, 여자는 희랍어를 배우는 수강생이다.

 남자는 고등학교 시절 안과의사의 딸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실어증 환자였다. 둘은 필담으로 소통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그녀와 헤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부탁한다. 먼 미래에 자신이 눈이 멀었을 때 필담으로도 소통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여자는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날이 그녀와 그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폐쇄되어 가는 현실과 싸우고 있는 그대로를 이해해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그래서 남자는 희랍어 강의 수강생 여자 주인공에게 말을 시키지 않는다. 다른 수강생이 말을 걸어 당황한 여자 주인공이 급하게 교실을 떠나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며 그녀를 달랜다. 어느 날 남자가 어두운 학원 복도 계단에서 넘어져 다치자 여자는 남자의 손바닥에 ‘병원으로 같이 가요’라는 글자를 한 자 한 자 적고는 그를 일으킨다.

 남자는 말을 할 수 없는 여자를 배려했고, 여자는 앞을 볼 수 없는 남자의 입장을 헤아려 말을 건 것이다. 작가 한강은 한 인터뷰에서 “구원 없는 세상을 살아온 두 인물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소통할 때 자신의 가장 연한 부분을 꺼내잖아요. 손바닥에 글씨를 써준다든지…그 연한 부분에서 삶은 시작되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조기 대선이 다가오면서 너도나도 소통을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소통 자체보다 소통에 담긴 진심과 소통의 대상에 대한 배려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소설#희랍어#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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